토니상 최초의 여성 단독 연출상 수상 이력
“한국이 나를 선택, 제2의 인생 시작 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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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데스타운’으로 토니상 최초로 연출상을 받은 여성 창작자 레이첼 채브킨 [놀유니버스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국이 절 선택했어요.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것 같아 설렙니다.”
기존 문법을 파괴한 ‘혁신가’의 다음 시선이 20세기 가장 아이코닉한 화가에게로 향했다. ‘아르데코의 여왕’으로 불린 폴란드 출신의 화가 타마라 렘피카(1898~1980). 러시아 혁명,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난 격변기에 붓 하나로 세상을 지배하려 한 예술가의 삶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이 작품의 한국 상륙이 더욱 주목받는 것은 무대 위 여성 화가의 강렬한 서사 못잖은 무대 뒤 여성 연출가의 화려한 이력 때문이다.
레이첼 채브킨은 미국 뮤지컬의 심장 브로드웨이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연출가였다. 그는 2016년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완전히 허문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2019년 그리스 신화에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착취를 엮은 ‘하데스타운’ 등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데스타운’은 여성 연출가 최초로 토니어워즈 연출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렘피카’(3월 21일~6월 21일, 코엑스 아티움)는 2024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이후, 아시아 초연으로 한국에서 막을 올린다. 레이첼 채브킨 연출가는 최근 한국 기자들과 가진 공동 인터뷰에서 “작품의 두 번째 프로덕션은 그 작품이 하나의 ‘고전(Canon)’으로 자리 잡는 과정이기에 첫 공연만큼이나 중요하다”며 한국 공연의 무게감을 전했다.
한 인간의 방대한 삶의 궤적을 160분 안에 담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채브킨 연출가를 따라다니는 별칭은 흥미롭게도 ‘공연계의 맥시멀리스트’다. 그가 연출하는 작품엔 늘 다채로운 인물과 다양한 사건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타마라 드 렘피카의 삶을 무대로 옮기기 위해 그가 세운 전략은 ‘압축’과 ‘몰입’이다.
채브킨 연출가는 “방대한 역사를 모두 설명하기보다, 유럽의 파시즘이 어떻게 시작되고 그것이 타마라와 주변의 삶을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사건들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타마라와 남편 타데우스가 러시아 혁명을 피해 파리로 망명해 삶을 재건하는 과정은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묘사되나 그 외의 시간 흐름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된다. 관객이 연대기적 순서에 매몰되기보다 “타마라의 감정적 여정과 아크(Arc, 성장 서사)에 더 깊이 몰입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채브킨은 귀띔한다. 특히 남편 타데우스와의 결혼 생활 붕괴와 뮤즈 라파엘라와의 관계 확장을 평행선상에 놓아 드라마의 밀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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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첼 채브킨 연출가 [놀유니버스 제공] |
사실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선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채브킨 연출가는 “(이 작품엔) 전형적인 남성 주인공의 여정이 없어 비평가와 관객 모두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전달하고자 했던 지점이 충분히 읽히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품을 만들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남성 중심적 서사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돌아보게 됐다”고 덧붙였다.
반면 한국에서 수년째 강세를 이어온 여성 서사극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흥행 청신호’가 켜진다. 채브킨 연출가는 “렘피카가 자신의 피사체를 그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연약함에 깊이 공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그는 신여성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녀의 강렬하고 흥분이 넘치는 삶은 물론, 그림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무대에선 초록색 부가티를 타고 스카프를 날리는 타마라의 자화상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쫓고 사랑하며 경제적 독립을 쟁취하는 신여성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안엔 욕망, 퀴어 정체성, 예술적 고뇌가 녹아든다.
자신이 그리는 렘피카처럼 채브킨 역시 남성, 백인 중심의 브로드웨이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된 신여성 상이다. 그는 앞서 토니상 시상식에서 자신이 후보에 오른 유일한 여성 연출가라고 언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채브킨은 “지금도 브로드웨이는 남성 중심적”이라며 “가족과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업무의 선을 긋는 순간마다 그 선택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려고 계속 스스로를 다잡는다”고 했다.
채브킨의 작품들은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무대 미학을 만들며 기존의 공연 문법을 파괴해왔다. 다만 전작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렘피카’는 채브킨 연출가가 앞서 선보인 ‘그레이트 코멧’과 ‘하데스타운’ 등과 묘하게 연결고리가 있는 듯 보인다.
그는 “‘그레이트 코멧’과 유사하게 뮤지컬에선 보기 드문 성숙하고 진솔한 인물과 이들의 삼각관계 민낯을 담았다”고 했다. ‘하데스타운’과 같은 시각적 충격도 이식했다. 여기에 현대적이면서도 정열적인 전자음악이 ‘렘프카’에 새로운 자극을 더했다.
채브킨의 연출관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한 번도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무대는 타마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각진 안무와 비대칭적인 미장센이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이 태동하는 혼돈의 시기를 살아낸 예술가의 삶은 그가 남긴 족적만으로도 오늘날 예술가들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든다. 채브킨은 트럼프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현재 미국의 정치적 상황(트럼프 행정부)과 타마라의 삶을 연결하기도 했다.
그는 “역사를 단순화하고 과거의 과오(노예제 등)를 부정하려는 권력에 맞서, 예술가는 시대적 복잡성과 인간의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며 “타마라는 혼돈을 완벽한 얼굴 뒤에 숨겼지만, 나는 그 무질서를 표면으로 드러내는 쪽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대 위 인물들이 보여주는 지저분하고 역동적인 감정들은 파시즘이 꿈꾸는 인간성 없는 완벽함과 대조를 이룬다”며 “‘렘피카’ 같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가해 온 해악을 인정하고 그 복잡함 속에 관객을 초대하는 일이다. 이 자체가 내가 살고 싶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