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에 얽힌 진실…전하지 못한 기억의 위로 [리뷰]

2020년 히가시노 게이고 동명 소설 원작
녹나무의 진실…‘염원’으로 기억 이어져
시공간을 뛰어넘는 추억과 사랑의 힘


영화 ‘녹나무의 파수꾼’ [애니플러스 제공]


※ 영화 ‘녹나무의 파수꾼’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굳이 결정하기보다 포기하는 것이 나은 인생이었다. 불륜으로 자신을 낳은 홀어머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그의 곁을 떠났다. 귀찮은 결정들 앞에서는 늘 동전을 던졌다. 의지가 아닌 세상이 떠미는 대로 흘러온 21살의 레이토(다카하시 후미야 분)는 결국 경찰서 구치소에 갇히며 인생의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곤경에 처한 그를 꺼내준 것은 엄마의 이복 언니인 치후네(아마미 유키 분)다. 대형 호텔 그룹의 고문인 치후네는 완벽주의에 가까운 남다른 아우라를 풍기며 조카의 인생에 등장한다. 그가 조카에게 원하는 것은 하나다. 월향신사에 있는 녹나무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이 나무에는, 비밀이 있다.”

영화 ‘녹나무의 파수꾼’ [애니플러스 제공]


숲의 모든 생명력이 응집한 듯, 경이롭고도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거대한 녹나무는 낮이면 소원을 빌기 위해 온 방문객으로 붐빈다. 파수꾼 레이토에게 주어진 진짜 임무는 해가 저물고 인적이 사라진 후에 시작된다. ‘염원’이라는 의식을 하기 위해 찾아온 방문객들을 도와주는 것. 치후네는 레이토에게 절대 염원을 엿들어서는 안 되며, 그것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라고 당부한다.

‘녹나무의 파수꾼’인 그의 삶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염원을 하는 아빠를 뒤쫓아 온 유미(사이토 아스카 분)와 여러 번 염원을 하기 위해 녹나무를 찾은 전통 과자점 아카미야 본가 사장의 아들 소키(미야세 류비 분)다. 레이토는 이들과 엮이며 조금씩 녹나무의 비밀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대체 ‘염원’은 무엇이고, 녹나무에 얽힌 진실은 또 무엇일까. 지난 18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녹나무의 파수꾼’이다.

영화 ‘녹나무의 파수꾼’은 일본의 대표 추리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2020년에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게이고의 소설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든 첫 작품이다. 녹나무의 비밀을 향해가는 미스터리 판타지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무한의 도화지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그 출발이었다. 게이고는 “작품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든다면 판타지적인 분위기를 더욱 잘 녹여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이번 작업을 통해 그 꿈이 실현됐다”고 했다.

영화 ‘녹나무의 파수꾼’ [애니플러스 제공]


영화 ‘녹나무의 파수꾼’ [애니플러스 제공]


수백 년의 비밀을 간직한 녹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경계를 두지 않은 상상력을 동력 삼아 영화에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무엇보다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깊은 숲의 어둠 속에서도 반딧불을 벗 삼아 반짝이는 거대한 녹나무는 그 자체로도 경이롭고도 신비롭다.

녹나무는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리기까지의 시간을 건너 그곳을 다녀간 이들을 이어낸다. 초승달과 보름달이 드는 날에 나무를 찾는 심야의 방문객들. 영화는 녹나무의 비밀을 찾는 미스터리한 여정에 무게를 두기보다, ‘염원’으로 이어진 이들의 사랑과 추억, 기억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영화는 ‘염원’이라 이름 붙인 오랜 의식을 통해, 나날이 심화하는 오늘날, 요즘 시대 ‘단절’의 문제를 바라본다. 낳아 기른 부모와 자식 간의 단절, 나아가 부모의 부재가 낳게 되는 또 다른 의미의 영원한 단절, 이를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가족 간 단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단절을 잇는 것은 녹나무다. 누군가 인생을 거쳐 쌓아 온 기억과 추억들, 그 안의 미처 전하지 못한 말과 마음들은 시공간을 넘어 소중한 가족에게 도달한다. 추억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어루만지고, 시간이 지워버린 잊고 있던 온기를 일깨운다. 뭐 하나 가진 것 없이 그저 포기하고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주인공 레이토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사랑하는 동생이 가장 지키고 싶었던 소중한 아이였음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녹나무의 파수꾼’ [애니플러스 제공]


기억을 잇는다는 판타지적 설정이 일깨우는 것은 시간과 추억의 값어치다. 비록 ‘염원’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함께 한 소중한 추억과 기억 속에 전하고 싶었던 그 모든 것이 있다는 깨달음이다. 아버지의 염원을 듣지 못한 소키가 결국 회사의 미래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장면은 특히 인상 깊다. 그가 아버지와 보냈던 수많은 추억, 그 시간 동안 소키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이 ‘염원’으로 작동하는 순간이다.

영화에는 귀를 즐겁게 하는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감성의 음악들이 등장한다. ‘용의자 X의 헌신’, ‘명탐정 코난’ 극장판 시리즈의 음악감독인 칸노 유고가 함께했다.

특히나 엔딩을 장식하는 ‘곁에서 달밤(傍らにて月夜)’은 아마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쉽지 않은 하루를 보냈을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앞·뒷면도 구분 못 하는 동전을 던져가며 살았던 삶이더라도, 아무래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삶이더라도, 그것을 지지하는 누군가의 사랑이 있음을 말이다. “스스로 선택해 사는 것과, 그냥 하루를 보내는 것도 다르긴 하지만 그런 것보다 영원히 살아 있어줘.”(‘곁에서 달밤’ 가사 중)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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