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란 세월의 무게…놓아주어야 할 것, 그리고 지켜야할 것 [리뷰]

돌아온 ‘앤디’와 ‘미란다’…영화 ‘악프입 2’
미디어의 변화…과거 아닌 ‘오늘’의 이야기
생존의 위기에 놓인 인물들의 선택과 분투
감각적이고 화려한 ‘런웨이’의 볼거리 여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변화만이 유일한 불변이다”라고. 완만하게 흐르던 시간 속에서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하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그것을 따라가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세월의 흔적조차 비껴간 듯한 앤 해서웨이와 메릴 스트립의 외모 정도일까.

지난달 29일 개봉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이하 ‘악프입 2’)는 본편 이후 2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변화’라는 키워드로 영리하게 메워낸다. 그 사이 세상은 변했고, 사람도 변했으며, 가치관과 취향은 물론 패션의 기준과 미디어 환경까지도 달라졌다. 작품은 익숙한 인물과 뉴욕 맨해튼이란 공간 위에 달라진 시대의 결을 덧입히며, 과거 영광의 연장선이 아닌 철저히 ‘지금’의 이야기로 채워낸다.

20년이 지난 현재, ‘앤디’(앤 해서웨이 분)와 ‘미란다’(메릴 스트립 분)는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런웨이’를 떠나 탐사보도 기자로 자리매김한 앤디는 커리어의 정점에서 뜻밖의 전환점을 맞는다. 뉴욕 언론클럽 시상식에서 수상자로 호명되는 순간, 동시에 회사로부터 해고를 통보받은 것이다. 시상대에 오른 그는 분노의 찬 연설을 쏟아낸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저널리즘은 중요하다고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한편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는 다른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패션계 노동착취를 방조했다는 폭로가 터지며, 오랜 시간 브랜드를 지탱해온 권위가 흔들린다. 광고주는 등을 돌리고, 온라인에서는 조롱이 증폭된다. ‘아침 드라마나 보게 생겼네’, ‘한물간 노인’. 위기 한가운데서, 진실은 좀처럼 힘을 얻지 못한다.

이 같은 국면에서 ‘런웨이’ 회장은 이미지 쇄신을 위한 돌파구로 앤디를 기획 팀장으로 영입한다. 그러나 미란다는 낙하산 인사인 앤디의 복귀를 탐탁지 않아 하고, 앤디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의 전문성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결국 광고주의 자본 없이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미디어 산업의 냉혹한 현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앤디는 흔들리는 ‘런웨이’를 되살릴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널 알던가?” 변함없이 차가운 미란다와 행동파 열정맨 앤디의 관계는 또 어떤 변화를 맞게 될까.

캐릭터와 배경, 하물며 배우들의 방부제 같은 외모까지 그대로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20년 전과 달라진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종이가 유행을 선도하던 시대, 쓰기만 하면 사람들이 읽고 따라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천하의 미란다도 광고주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하고, ‘골든 키보드’ 수상자인 앤디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클릭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압박에 내몰린다.

상사가 곧 하늘이던 시대 역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집무실 앞에서 코트를 내던지며 독설을 서슴지 않던 미란다는 이제 스스로 옷을 입고, 뚱뚱한 것을 뚱뚱하다 말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자꾸만 감상과 슬픔이 스며드는 그의 눈빛은, 시간의 흐름이 남긴 변화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의 정체성과도 같은 패션도 변화의 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20년 전 본편이 샤넬과 프라다, 발렌티노 등 하이엔드 브랜드를 중심으로 ‘권위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속편에서는 컨템포러리까지 아우르는 훨씬 넓어진 스펙트럼이 눈에 띈다. “답은 조용한 럭셔리야.” 어김없이 ‘인형 놀이’를 시작한 ‘나이젤’(스탠리 투치 분)이 토템 투피스를 꺼내 드는 장면은, 하이엔드라는 명품의 절대적 기준마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명품이 나를 규정하던 시대에서, 내가 명품을 선택하는 감각으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뚜렷해진 개성과 정체성 속에서 캐릭터별 스타일 변화 역시 흥미롭다. 촌스러운 기자 지망생에서 화려한 명품 스타일로 완성된 앤디는 이제 절제된 실루엣과 정적인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한, 보다 현실적이고 웨어러블한 스타일을 구축해 나간다. ‘에밀리’(에밀리 블런트 분)는 ‘패션 아이콘’이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이며, 구조적인 실루엣과 강한 색 대비, 존재감을 극대화하는 하이패션 스타일링으로 자신을 하나의 이미지로 완성해 간다.

미란다는 변함없이 테일러링과 선을 강조한 옷을 즐겨 입지만, 과거보다 강렬한 색감 대신 한층 차분하고 절제된 톤을 선택하며 변화된 현실을 반영한다. 다만 20년 만의 귀환을 알리는 상징적인 ‘레드 드레스’ 첫 등장 장면만큼은, 여전히 그의 존재감을 압도적으로 각인시킨다. 마돈나의 보그(Vogue)와 함께 스크린을 장식하는 감각적이고도 화려한 패션의 향연, 전주만으로도 설레게 만드는 ‘정품’만이 줄 수 있는 ‘엣지’는 그대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전편이 개인의 성공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중심에 두었다면, 이번 작품은 한층 확장된 시선으로 변화와 ‘생존’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응시한다. 무엇을 바꾸어야 살아남을 수 있으며, 그럼에도 끝내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트렌드와 변화가 생명인 패션계, 온라인 스트리밍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밀려나는 언론계의 현실과 맞물린 이 묵직한 질문들은 ‘악프입 2’만의 감각적이고 화려한 볼거리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물론 변화만을 좇다 보면 나를 잃을 수 있고, 반대로 버티기만 해도 폼페이의 용암처럼 밀려오는 변화에 휩쓸려 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이 질문에 단정적인 답을 내리지 않는다.

아무리 전통적인 저널리즘을 추구한 의미있는 기사라해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 독자의 마음을 움직여, 모두가 읽는 특종으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변화에 맞서 싸우는 것이 오늘날의 덕목이지만, 그렇기에 묵묵히 오랜 시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나이젤과 같은 인물이 더욱 빛나는 것은 아닐까. 영화가 거듭 되묻는 질문은 더욱 거세지는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AI)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갈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최근 진행된 ‘악프입 2’ 내한 기자회견에서 메릴 스트립은 속편이 나오기까지 걸린 긴 공백에 대해 “20년이 걸려야 했던 영화”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 작품은 결국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으며,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한 속편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한편 앤디의 보조 ‘친처우’(선위톈 분) 캐릭터를 둘러싼 인종차별 이슈는 실제 영화 감상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20년 전 앤디의 모습과 Z세대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이 캐릭터가 서사 안에서 갖는 비중도 적지 않다. 본편을 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지만, 캐릭터들 간의 관계성 변화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악프입 1’ 주행 후 관람을 추천한다.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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