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아유타야의 사원들…영광과 굴욕의 역사 [정용식의 사찰 기행]

(110) 태국 아유타야 왓 야이 차이몽콘, 왓 프라 마하탓, 왓 프라 시산펫


‘불교 국가’ 태국 3

태국 아유타야의 왓 프라 마하탓 사원



우리나라 경주는 도시 대부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다. 특히 경주 남산은 불교미술 유산이 집중된 산지 유적군으로 불국토를 꿈꿨던 신라시대의 탑과 불상, 사찰(터)들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목 잘린 부처상, 인위적인 손에 의해 부서진 탑, 파괴되고 훼손되어 터만 남겨진 사찰들이 곳곳에 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 젊은 유생들의 객기 어린 장난이 빗어낸 비극적 산물이다. 527년 불교를 국가종교로 공인한 이래 935년 멸망되기까지 400여년 동안 경주는 불국토를 꿈꿨던 신라의 수도였다.

태국에도 비슷한 곳이 있다. 방콕에서 북쪽으로 약 80여㎞, 1시간 거리에 태국의 두 번째 왕조였던 아유타야왕조(1351~1767년)의 수도이자 400여년 동안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 피우며 불국토를 꿈꿨던 ‘아유타야’시(市)다.

아유타야의 왓 프라 마하탓 사원


동남아시아 국제무역중심지로 번성했던 아유타야 왕조는 압도적인 분위기의 거대한 불탑과 웅장한 사원, 건축물을 수없이 세웠고 태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 피웠다. 그러나 1767년 버마(미얀마)의 침공으로 철저하게 파괴돼 200여년 동안 정글 속에 방치되는 아픔을 겪었다. 1957년에야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서 현재 400여개의 유적과 사원이 확인되는 등 세상에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유타야는 도시 전체가 크메르(캄보디아), 스리랑카, 태국 양식의 혼합건축과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유적지로서 태국불교와 왕가의 변천사를 보여주고 있어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태국 불교문화의 중심지였기에 태국불교와 역사에 관심 있는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며 매년 10일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하는 문화축제를 개최하기도 한다.

아유타야엔 복원하고 있는 수많은 유적 중 대표적인 사원으로 많이 알려진 곳은 나무뿌리 속 불두(佛頭)로 유명한 ‘왓 마하탓’, 아유타야 왕실 사원인 ‘왓 프라 시산셋’,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하는 ‘왓 차이왓타나람’, 거대한 와불과 탑이 있는 ‘왓 야이 차이몽콘’ 등이다.

태국 역사 속의 아유타야…영광과 굴욕


아유타야 왕의 여름 별장 ‘방파인 궁전’


태국은 7000만 인구의 동남아시아 부국으로서 6·25 전쟁 때는 우리나라에 파병해 친근감이 있는 국가다. 면적이 남한의 5배 이상 큰 나라이며 수도 방콕도 서울 두배 크기다.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쇼카왕이 보낸 승려들이 스리랑카를 통해 태국에 처음 불교를 전했고, 8세기경 대승불교가 전해지기도 했다. 이후 미얀마의 영향과 태국 최초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1238~1350년) 시기에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전해지면서 사회 전반의 규범과 일상 관습을 형성하게 됐다. 가장 강성했던 아유타야 왕조(1351~1767년)는 상좌부 불교를 국가체계로 확립했고 불교를 외교적, 문화적 교류의 도구로 활용해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방파인 궁전


강력했던 아유타야 왕들은 자신의 존재 과시와 백성들을 숭배하도록 하고자 수많은 건축물을 세웠다. 하지만 왕조의 강력한 힘이 불상과 불탑들에서 나온다고 여긴 같은 상좌부 불교국가였던 버마의 침공으로 완전히 파괴됐다.

방파인 궁전


버마가 아유타유 왕조의 힘을 없앨 수 있다는 믿음으로 불교 유적들을 훼손시켰듯 아유타야왕조도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도 같은 행위를 하지는 않았을까. 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세운 톤부리 왕국의 딱신왕(1767~1782년)은 수도를 방콕 서쪽 톤부리지역으로 이전했다.

방파인 궁전 내 라마 5세 초상화


그러나 쿠데타로 톤부리 왕조를 15년 만에 무너뜨리고 등장한 차크리 왕조(1782~현재)는 방콕을 수도로 정하고 불교를 다시 재조직했는데 라마1세는 불교를 중심으로 국왕이 절대권을 갖는 종교적 절대주의를 구축하고 정당화했다.

방콕의 ‘왓 프라깨우’(왕실 사원)에 에메랄드 불상을 모셨고 사원건립, 경전편찬, 승풍쇄신을 통해 불교를 보호하면서 국왕은 국가정체성과 결합한 불교의 수호자가 됐고, 사원과 승단은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도록 했다.

방파인 궁전


아유타야 왕의 여름 별장 ‘방파인 궁전’도 파괴돼 차크리 왕조 때 복원된 곳이지만, 정원과 호수, 유럽식 건축과 태국 전통 양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을 평화롭게 걸으며 옛 영광의 흔적이라도 느껴 봤다.

아유타야는 도시건물 지붕 끝 모습들이 불꽃처럼 특이한데 불꽃이 타오르듯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고 한다. 도심에 들어서니 길목마다 붉은 벽돌 유적들이 널브러져 있고, 부서진 불상, 파괴된 불탑들도 손쉽게 볼 수 있어 아유타야가 유적의 도시임을, 그리고 도시 전체가 얼마나 산산이 파괴됐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무너진 사원들 1…72m 불탑 사원 ‘왓 야이 차이몽콘’


왓 야이 차이몽콘의 72m 탑


‘왓 야이 차이몽콘’ 사원은 아유타야 초대 왕이 스리랑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스님들의 명상 수행을 돕기 위해 만든 사원이다.

탑의 중앙 계단


사원 중앙에는 1592년 미얀마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스리랑카 양식의 72m 거대한 탑(체디)이 있는데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왓 야이 차이몽콘의 탑


탑의 중앙 계단을 따라 중간 전망대까지 올라가서 한 바퀴 삥 둘러보니 주변에 크고 작은 많은 탑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옛 영광만을 드러내는 흔적만 남아있다.

왓 야이 차이몽콘 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그러나 중앙탑을 둘러싸고 수십기의 불상들이 정렬된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본당 입구의 머리가 여섯인 뱀 ‘마가신’


널따란 본당 입구에는 머리가 여섯인 뱀, ‘마가신’이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었고 내부에는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큰 좌불상이 많은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와불상


본당 옆쪽에는 깔끔해서 근세에 만들어진 듯한 석고를 덧입힌 큰 와불상이 열반상임을 표현하며 허물어진 붉은 벽돌 안에 가득 차게 누워있어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와불상 발바닥


가늘고 기다란 여성미가 돋보이는 와불상 발바닥에 동전을 붙이면 소원이 이뤄진다며 가이드가 동전을 건네주었으나, 지금은 동전 붙이는 행위를 못 하도록 하고 있어 주머니에 동전만 댕그라니 남아버렸다.

무너진 사원들 2…나무뿌리 속 부처 머리 ‘왓 프라 마하탓’


왓 프라 마하탓의 상층부가 무너져 내린 대탑(프랑)


1374년경 아유타야 왕국 초기에 크메르 양식으로 건축된 ‘왓 프라 마하탓’은 아유타야에서 최고 승려인 승왕(僧王)이 거처했던 곳으로 국가불교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사원이었다.

왓 프라 마하탓 대탑(프랑) 앞 불상


그래서인지 회랑(回廊)과 불당의 흔적은 당시 사원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를 짐작게 하며, 사원 가운데 상층부가 무너져 내린 크메르 양식의 육중함이 느껴지는 탑(프랑)도 높이가 50m에 달했다고 한다.

왓 프라 마하탓


이 탑은 전쟁의 피해보다는 1904년 세월의 무게를 이지 못해 상층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내부에 있던 유물과 보물들이 도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고 일부 수습한 금불상과 보석장식품 등은 방콕 국립박물관에 보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머리가 잘려 나간 불상들


넓고 넓은 사원 안의 수많은 건물과 탑들은 대부분 파괴된 채 기단과 일부 구조만이 남아있고, 수백개는 됨직한 불상들도 목이 잘려, 몸체와 머리가 별도로 널브러진 듯 진열돼 있다.

머리가 잘려 나간 불상들


전쟁이 낳은 비극이지만 피아 같은 종교의 상징물임에도 그렇게도 잔인하게 파괴할 수 있었겠느냐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나무뿌리에 갇힌 불두


나무뿌리에 갇힌 불두로 잘 알려진 왓 프라 마하탓 사원을 방문한 정용식 ㈜헤럴드 상무


1767년 미얀마가 침략 당시 그렇게 잘려 나온 부처님의 두상(佛頭)이 나무뿌리 옆 땅바닥에 뒹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뿌리에 감겨 환생한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나무뿌리에 갇힌 불두


나무뿌리에 갇힌 불두는 ‘왓 프라 마하탓’ 사원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다.

무너진 사원들 3…아유타야 왕궁 사원 ‘왓 프라 시산펫’


왓 프라 시산펫 사원 중앙의 3기 탑


아유타야의 상징적인 유적지 중 하나인 왕실 전용 사원 ‘왓 프라 시산펫’은 가장 큰 사원이며 신성시됐던 곳이다.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종(鐘)처럼 생긴 큰 규모의 탑(체디)들을 세웠는데 현재는 3기의 탑이 중앙에 나란히 균형 있게 남아 있어 아유타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왓 프라 시산펫 사원 중앙의 3기 탑


아유타야 초기의 탑은 크메르식 불탑(프랑)이었는데, 3기의 탑은 이를 벗어난 전환점이 되는 스리랑카 양식의 흰색 파고다(종형 불탑)로 그 안에는 역대 왕 3명의 유골, 의복, 불상을 넣은 상자가 내부에 묻혀 있다고 한다.

왓 프라 시산펫 사원의 건축 모형


15세기경 왕실 법당에 ‘프라시산펫’이라 이름 붙인 거대한 금불상을 조성했는데, 사원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왓 프라 시산펫


1767년 버마군의 침략 때 불상을 덮고 있던 금 200㎏은 약탈해 가고 불상은 파괴했다고 한다.

왓 프라 시산펫 왕궁터


사원 안쪽에 있는 넓은 왕궁터는 아유타야 왕국의 옛 영광과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왓 프라 시산펫 사원의 목이 잘려 나간 불상들


이외에도 크메르양식의 아름다운 탑(프랑,prang)이 잘 보존된 ‘왓 라차부라나’, 아유타야 후기 앙코르와트의 영향을 받은 웅장한 중앙탑(프랑)이 있는 ‘왓 차이왓 타나람’, 42m 대형 와불이 포토존이 되고 있어 많이 찾는 ‘왓 로카야 수타람’ 등도 아유타야 대표 유적들이다.

탁발 공양과 상좌부 불교


탁발 공양을 하는 시장 옆 사찰의 아침 6시 모습


불자가 95% 이상인 태국에서 상좌부 불교 사원은 종교 공간을 넘어 교육, 복지 등 지역 공동체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결혼식, 장례식 등 중요 사회활동도 이뤄지고, 사원과 승려는 사회정치문화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승려가 사회 속에 가까이 있고 불교적 가치가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생활윤리로 작용하면서 태국 남성이라면 한 번쯤 출가해 승려로서의 삶을 사는 풍습도 있을 정도다.

특히 상좌부 불교국가에선 초기 불교에서 부처와 제자들이 직접 마을을 돌며 탁발했다고 하여 지금도 승려들이 발우를 들고 음식을 보시받는 탁발이 수행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신도들은 탁발에 보시하는 것을 큰 공덕으로 생각하며 스님들은 오전 이후에는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전통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탁발 공양을 하는 시장 옆 사찰


불교에서 탁발은 단순히 음식을 얻는 행위가 아니라 욕심을 줄이고 겸손을 배우며, 재가자와 수행자가 서로 공덕을 나누는 수행 행위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상좌부 불교국가에서도 방콕 등 대도시 등에선 쉽게 볼 수 없고 이를 벗어난 도시에 가야 요즘에도 새벽 탁발이 일상화된 곳들이 있다고 한다. 새벽이 되면 승려들이 맨발로 줄지어 걷고 시민들이 길가에서 음식과 물, 간단한 생활용품 등을 사거나 가져와서 공양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탁발 문화가 있다는 아유타야에서 숙박하고 탁발 공양이 있다는 호텔 가까운 시장에 새벽 탁발 공양에 참여하고자 아침 6시에 찾아갔다. 그러나 가던 날이 시장 가게들이 문을 많이 닫는 일요일이라 탁발도 쉰다고 해 허망하기에 그지없었다.

사찰 앞에서 공양 물품을 판매하는 모습


부득이 스님들이 계시는 인근 사원을 찾아가니 입구에서 공양을 위한 음식물과 꽃을 팔고 있었다.

몇몇 신도들은 여기서 사기도 하고, 가져오기도 하여 공양하고 있어 필자도 공양물을 사서 사원에 들어가 밥은 밥대로, 국은 국대로, 꽃은 꽃대로 공양을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찰 공양처


상좌부든 대승불교든 부처의 핵심 가르침은 같을 것이다. 상좌부 불교의 위빠사나 명상(호흡을 관찰, 마음 알아차림)도 한국의 선명상과 맥을 같이하는 듯 보였다.

몇 곳의 사찰과 도시의 겉모습을 통해서나마 상좌부 불교의 흔적 여운이라도 느껴본 소중한 여행이 됐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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