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초 단위 반응은 끔찍”…괴르네·선우예권의 대등한 선율

오는 21일 한세예스24문화재단
괴르네와 선우예권 ‘겨울 나그네’

마티아스 괴르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한세예스24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프리카부터 북극까지, 5개 대륙에서 ‘겨울나그네’를 부르며 수많은 관객과 교감했다. 5~6살 무렵 슈베르트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슈베르트가 없었다면 성악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 고백한다. 그는 세계적인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다.

“부모와 아이 셋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서로 대화는 하지 않고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더라고요. 이런 삶이 계속된다면 인류의 종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괴르네는 슈베르트최근 뉴욕에서 마주한 이 장면을 200년 전 작곡한 슈베르트의 ‘고독(Einsamkeit)’(겨울나그네 12번째 곡)의 현대적 버전으로 읽었다.

공연을 앞두고 한국 기자들과 만난 괴르네는 “지금 우리 사회는 일은 너무 많고 소통은 너무 적다”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이 줄어드는 이 시대에, 인공지능이라는 또 다른 위협까지 더해진다면 매우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37년 동안 ‘겨울나그네’를 불러왔지만, 지금의 그에게 이 작품은 19세기 실연한 청년의 노래가 아니다. 초연결 속에서도 소외되는 오늘날 ‘인간에 대한 질문’이다.

괴르네는 “세계 대륙을 다니며 250회 정도 ‘겨울나그네’를 연주했는데, 어느 지역에서나 청중의 반응은 비슷했다”고 회고했다. 2400여명의 인구, 전 세계에서 모인 과학자들 덕에 45~50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북극 스피츠베르겐 제도에서의 공연은 그에게 무척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괴르네는 “노르웨이인이든 한국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국적과 무관하게 모두가 같은 깊이로 감동받는 반응을 봤다”고 전했다. “이것이 ‘겨울나그네’의 가장 혁명적인 지점”이라고 했다.

이번 한국 무대(6월 2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괴르네는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함께 한다. 두 사람은 이미 베를린에서 첫 리허설을 마쳤다. 선우예권은 “선생님의 음반을 오랫동안 들으며 음악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받아왔다”며 “직접 옆에서 세밀한 뉘앙스와 다이내믹, 언어의 액센트 표현법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축복이었다”고 했다. 괴르네 역시 “선우예권과의 만남은 환상적”이라고 했다.

마티아스 괴르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 [한세예스24문화재단 제공]

그간 무수히 많은 가곡 무대에서 마리아 조앙 피레스를 비롯해 세계 최정상의 피아니스트와 호흡을 맞춰온 괴르네는 “솔로 피아니스트와 함께 할 때 그들이 가진 기교나 개성이 흥미로운 작업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통상적으로 가곡 무대에서 피아노는 성악가의 호흡을 떠받치는 ‘반주’의 위치로 여겨진다. 그러나 괴르네는 이 무대는 성악과 피아노의 대등한 ‘길항 작용’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피아니스트가 내 마음을 억지로 읽으며 초 단위로 반응한다고 느껴질 때 거슬림을 느낀다. 이 경우 피아니스트는 반응하는 사람에 그치게 되고 나의 연주보다 나노초 만큼 뒤처진다”며 “가장 끔찍한 것은 ‘다 맞긴 한데 완벽하게 외워서 치고만 있다’고 느껴질 때”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 작업은 피아니스트와 성악가 독립성과 개인성을 가지고 최대한 자신의 연주를 하는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고 했다.

선우예권과의 호흡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다. 그는 “리허설은 서로가 가진 취향과 생각, 신념을 나누는 시간”이라며 “카리스마를 가진 연주자인 만큼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괴르네와 선우예권은 올 가을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과 함께 미국에서 6번의 콘서트도 이어간다. 괴르네는 “내가 백 살이 될 때까지 함께 연주하고 싶다”며 웃었다.

‘겨울 나그네’는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 24편에 슈베르트가 선율을 얹은 거대한 연가곡이다. 사랑의 좌절 이후 춥고 시린 길을 떠나는 방랑자의 내면 여정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고독과 상실을 들여다 본다.

괴르네는 “‘겨울나그네’는 고통 같은 과거, 그 과거를 딛고 나아가는 여정에서의 외로움과 고독,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며 “냉소적으로 삶을 비관하기 보다, 우울과 슬픔 속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찾고 함께할 누군가를 발견하는 음악”이라고 해석했다.

마티아스 괴르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한세예스24문화재단 제공]

선우예권이 “슈베르트 특유의 화성적 진행과 반음계적 연결성이 마음을 강하게 파고든다”고 말한 21번째 곡 ‘여인숙’은 독특한 위치에 있는 곡이다. ‘겨울나그네’는 전반부(1~12곡)가 실연의 상처를 안고 떠난 길 위에서 혹독한 자연과 부딪히는 과정이라면, 후반부(13~24곡)는 방랑자의 내면 붕괴와 환각, 심리적 고립으로 침잠하는 단계를 그린다.

극단의 심리적 한계선에 놓인 제21곡 ‘여인숙’은 음악적 밀도가 최고조로 응축된다. 괴르네는 “도입부의 피아노는 마치 묘지에서 들리는 관악기 같다. 세 마디 뒤 크레셴도가 시작되며 점점 고조되다가, 마침내 성악이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장송곡의 코랄이 된다”고 설명했다. 방랑에 지친 주인공은 여인숙으로 착각한 묘지를 찾아 ‘영원한 안식’을 청하려 하지만, 그곳에 나그네의 빈 방은 없었다. ‘죽음’을 거절 당한 그는 유일한 친구인 지팡이와 다시 살아갈 길을 떠난다. 22번째 곡 ‘용기’를 통해 다시 힘을 내고 23번째 곡 ‘환영의 태양’에서 빛의 다양한 형상을 마주한 뒤, 마지막에 이르러 낯선 ‘거리의 악사’를 마주한다.

괴르네는 “나그네는 죽음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악사처럼 당신이 내 멜로디를 연주해주고 내가 노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닐 수 있다는 질문이 거기 담겨 있다”고 했다. 그가 ‘겨울 나그네’를 “비관으로 끝나지 않는, 매우 긍정적인 작품”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이번 무대는 한세예스24문화재단의 두 번째 ‘클래식 리트’ 프로젝트다. 통상 늦가을이나 겨울에 무대에 오르는 단골 레퍼토리를 한여름에 감상하는 이색적인 기획이 돋보인다.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은 “연주자의 삶과 관록에 따라 전혀 다른 감동으로 정립될 수 있는 곡이기에 다시 한번 ‘겨울나그네’를 택했다”며 “향후 무대에서는 슈만, 말러 등 다양한 작곡가로 외연을 확장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문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전석 무료 초청으로 진행되는 공연은 이벤트 응모에만 무려 1만 5000명 이상이 몰리며 폭발적인 관심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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