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정통사극 ‘정도전‘을 만든 까닭

[헤럴드경제=서병기 기자]지상파 중에서는 KBS만이 정통 역사드라마, 대하사극들을 꾸준히 제작하고 있다. 대하사극 제작에는 위험이 따른다. 미니시리즈 3~4개를 합친 숫자보다 더 많은 수의 출연배우와 세트제작비까지 합치면 막대한 편당 제작비가 투입된다. 이렇게 해서 별로 반응을 얻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 돈을 썼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공영방송으로서 왕조 권력 뒤편이나 퓨전사극이 아닌 정사를 가지고 온고지신을 목적으로 하는 정통사극을 제작해야 하지만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퓨전사극이니 팩션이니 하며 필요 이상의 과도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극 제작진들은 역사와 역사드라마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많은 국민, 더구나 국사를 배우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사극을 통해 역사를 학습하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하면 정사로 승부를 거는 정통사극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일본은 최고의 역사소설가로 인정받는 보수주의자 시바 료타로 등의 소설을 NHK에서 대하사극으로 만든다. ‘료마가 간다’를 방송함으로써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를 일본 최고의 영웅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KBS 대하사극은 ‘용의 눈물’(1996년)과 ‘태조 왕건’(2000년) 등 국민 드라마가 됐던 정통사극의 전성기를 거쳐 ‘대조영’(2007년)과 ‘대왕세종’(2008년)까지는 대중성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근초고왕’(2010년), ‘광개토대왕’(2011년)은 별로 이슈가 되지 못했고, ‘대왕의 꿈’(2012년)은 시청률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기도 했다.

KBS가 이런 고민 속에 빼어든 야심찬 승부수인 ‘정도전’은 오랜만에 볼 만한 정통사극이다. 배경은 이전 사극에서도 자주 다뤘던 고려말 조선초의 격변기요 난세다. 권문세족은 여전히 부를 독차지하고 사병을 거느리며 도탄에 빠진 백성을 외면한다. 정도전 역의 조재현은 “600년 전의 상황이 지금과 많이 다르지 않다. 지금도 국민 만족지수는 높지 않다”면서 “새로운 정치에의 기대가 나오고 있고, 정사를 좇아가다 보니까 마니아들의 지지도 많고 시청자들이 대리만족을 느끼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진사대부는 정치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이때, 성리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이상과 정치이념을 들고 나온다. 기존의 질서를 개편하려는 아이디어는 있지만 현실적인 힘이 떨어지는 신진사대부 정도전(조재현)은 기득권의 정점에 있는 이인임(박영규)의 노회한 전략에 말려 번번이 고전했다. 처음에는 과격한 운동권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현실정치를 경험하며 지략과 융통성을 갖추는 여우로 변모하고 있다.

‘정도전’이 ‘개그콘서트’의 시청률을 누르고 대중성과 완성도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기획과 대본, 연출력, 거기에 주인공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다. 특히 절제된 연기를 펼치는 이인임 역의 박영규는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박영규는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캐릭터를 보여주며 정도전에게 동기부여를 확실하게 해주었다.

정현민 작가가 이인임의 입을 통해 대량 방출하는 명대사는 요즘 정치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원리로도 손색이 없다. “정치인의 허리와 무릎은 유연할수록 좋은 법.” “의혹은 궁금할 때 갖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감당할 능력이 있을 때 제기하는 것이오.” “전쟁에서 적을 만나면 칼을 뽑아야 하지만 조정에서 적을 만나면 웃으세요.” “내가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적과 도구라는 두 부류의 사람만 있다고 했지. 삼봉은 도구가 아니라 적이다.” “힘 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도 없지요. 세상을 바꾸려거든 힘부터 기르세요.” 등은 정치인들이 메모해둬야 할 말이다. ‘정도전’을 보면 난세의 지략이 담긴 처세서를 읽는 것 같다.


노채(폐결핵)에 걸린 이인임도 곧 퇴장한다. 우직한 원로 최영(서인석)과 이성계(유동근)는 서로 갈라선다. 이인임이 죽어야 정도전이 이성계와 함께 새 나라를 세워 새로운 개혁 정책들을 펼칠 수 있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은 이인임의 퇴장은 벌써부터 시청자를 섭섭하게 한다.

정현민 작가는 “지금의 시대가 난세라면 난세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정도전’을 통해 꿈을 가지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정도전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를 전한 바 있다. 정도전에게서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진짜 정치를 보고 싶은 게 시청자의 바람일 것이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