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퇴근 못하는 동생’ 9·11엔 있고 삼풍엔 없다 [60년의 트라우마⑤]

삼풍 붕괴 참사로 동생 잃은 김문수 씨
동생 찾아 잔해 헤맸던 30년 전 그날
“참사 잊어선 안 돼” 유족들과 연대활동
“9·11메모리얼 센터 보면 가슴 아파”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희생자 김학수(당시 26세) 씨. 이영기 기자.


[헤럴드경제=이영기 기자] “1995년 아이가 태어났다면 올해 30살입니다. 한창 꽃피울 성년이죠. 근데 참사 이후 30년이 흘렀는데, 우리 사회도 재난에 대해 성숙해졌나요?”

삼풍백화점 참사로 막내 동생 고(故) 김학수 씨를 잃은 형 김문수(65) 씨는 아픈 기억을 되짚으며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참사 발생 때마다 ‘시체팔이’ 등 온갖 조롱과 비방에 유족은 피눈물을 흘리는 일은 반복되고 있다. 김씨는 우리 사회가 참사를 대하는 방식이 성숙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도 또렷한 30년 전 그날


이달 11일 헤럴드경제와 만난 김 씨는 지갑 속에 30년 동안 품고 있는 명함을 꺼내 보였다. 반듯하게 코팅이 된 명함에는 ‘금강안경 콘택트렌즈 삼풍백화점 안경사 김학수’라고 적혀 있었다. 삼풍백화점 참사로 희생된 동생이 쓰던 것이다. 9살 터울 동생이 태어나던 날, 형은 탯줄 자르던 가위를 직접 불에 달궜다.

지난 11일 김문수 씨가 헤럴드경제와 만나 1995년 삼풍백화점 참사 상황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영기 기자.


당시 대구에서 근무했던 김씨는 삼풍이 무너졌단 소식을 듣자마자 간신히 서울행 밤기차에 탔다. 동생은 연락 두절. 하지만 이미 구조돼 병원 어딘가에 있을 거라 기대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 시내 병원을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다. 다음날에서야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으로 갔다.

지하층 상황을 살펴볼 유족 대표 20명을 뽑자는 얘기가 나오자 김씨는 제일 먼저 손 들었다. 접근할 수 있었던 중앙 지하계단을 통해 구조대와 유족 무리가 지하로 향했다. 지하 1층에 들어서자 자욱한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코로 훅 들어왔다. 머리 위로는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지는 위험한 지경이었다. 지하 1층에서 유족 절반이 혀를 내두르고 나갔다. 지하 3층까지 내려간 건 김씨와 다른 유족 1명뿐이었다.

그는 “‘동생 찾으려다 나까지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위험했다”며 “엘리베이터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고 건물 잔해는 시신 조각들과 뒤엉켜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20여일 뒤에 동생을 만났다. 얼굴엔 피부가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백골’ 상태였다고 한다. 다행히 지문이 남았고 입고 있던 옷에서 신분증이 나와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유족들의 심적 고통은 극심했다. 그는 “시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외부에서는 유족들이 보상금을 챙기려고 한다는 둥 시신 장사를 한다는 둥 온갖 유언비어가 돌았다”며 “남은 사람들은 고생하는데 먼저 동생 찾았다고 떠나기 미안해서 휴가를 내고 일주일을 더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유족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심어주는 조롱과 혐오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최근 무안 제주항공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유족들 상처 주는 말들을 많이 하더라”며 “특히 세월호 때는 단식하는 유족들 옆에서 음식 시켜 먹으면서 조롱하는 사람들 있지 않았냐.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사회적인 참사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참사 기억하고 나아가야”


김문수 씨 동생 학수 씨의 삼풍백화점 안경점 명함. 이영기 기자.


형 김문수 씨는 참사 앞에서 우리 사회가 부채 의식을 갖고, 올바르게 사고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와 구성원이 ‘나는 아직 안 겪었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참사 희생자와 유족에게 부채 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참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왜 우리가 참사를 막지 못했나, 다음 참사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부채 의식과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 참사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삼풍백화점 유족이 당시에 사건이 좀 더 기억될 수 있게끔 위령탑도 삼풍백화점 위치에 설 수 있도록 더 모질게 싸웠다면 세월호 같은 참사가 발생했을까 반문하게 된다”며 “지금도 이어지는 참사 희생자 유족한테는 늘 죄송한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대구지하철 화재, 세월호 침몰 참사 유족들과 연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4·16재단의 부설기관으로 설립된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활동도 하고 있다. 참사가 제대로 기억되려면 힘들더라도, 누군가는 꾸준히 일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단 마음에서다.

그는 “9·11 테러를 기억하는 ‘메모리얼 센터’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며 “이제 폭삭 주저앉은 백화점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각성할 수 있게끔 교훈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남겨놓은 게 없지 않냐”고 씁쓸하게 말했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희생자 김학수 씨가 30년 전 김문수 씨에게 선물한 안경.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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