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집중투표제와 ‘게임의 법칙’


상법 개정이 숨가쁘게 추진되고 있다. 이사가 주주를 위해 충실히 직무를 수행하도록 이사의 충실의무를 강화한 최근 상법 개정은 여러 우려도 있지만 상장회사를 중심으로 이미 변화의 움직임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사회의 경영판단 기준을 새롭게 점검하거나 주주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모색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상장회사들의 이런 노력은 매우 긍정적이다.

그런데 이 같이 강화된 충실의무를 부담하는 이사를 어떤 방식으로 선임해야 하는지가 또 다른 상법개정 이슈로 부상했다. 바로 ‘집중투표제 의무화’다. 이사가 아무리 ‘회사와 주주를 위해’ 충실히 직무를 수행할 의무를 부담하더라도 지배주주의 영향력 하에서 선임된다면 전체주주나 총주주의 이익보다는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것이라는 미덥지 못한 마음이 집중투표제 의무화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사 선임의 문제는 우리 상법이 고민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 중 하나다. 상장회사의 경우 이사회의 구성에 관해 상법 규제가 강화돼 있다. 현재 상장회사는 전체 이사 수의 4분의 1 이상(자산총액이 2조원 이상인 상장회사는 과반수 이상)을 사외이사로 선임해야 하는데 7월 상법 개정으로 3분의 1 이상으로 상향하고, 그 명칭도 독립이사로 변경했다.

개정 상법은 독립이사를 사내이사, 집행임원 및 업무집행 지시자로부터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이사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업무집행 지시자에 해당할 수 있는 지배주주의 영향력으로부터도 독립돼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사의 충실의무와 더불어 독립이사 제도를 통해 전체주주 또는 총주주의 이익이 보장될 수 있는 제도나 기업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재 당면한 우선 과제다.

그럼에도, 집중투표제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다소 조급해 보인다. 집중투표제는 글로벌 스탠다드로 볼 수 없는 제도임에도 우리나라는 마치 정해진 ‘답안’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사 선임의 방식을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어렵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은 1940년대에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절정을 이뤄 22개주가 이를 도입했다가 1950년대 이후부터는 다시 임의규정화 추세로 바뀌었다. 현재는 애리조나, 네브래스카 등 5개주에서만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1950년에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도입했다가 1974년에 폐지했다. 다른 해외 선진 국가들 중에서도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국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집중투표제는 이론적으로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은 제도로 평가된다. 이사회에 소수주주를 대변하는 이사가 선임됨으로써 이사회 자체가 분쟁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미국 교원연금기금이 기업지배구조에 관한 정책서에서 특별이해관계(special interest) 있는 이사가 선임될 수 있다는 이유로 집중투표 안건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경영권 분쟁이 있는 기업의 경우 집중투표제를 고리로 경영권 분쟁이 가속화하기도 한다. 해외 행동주의 펀드가 집중투표제 도입을 반기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상법에는 외국에는 없는 3% 룰이 있다. 당초 감사 제도에 도입됐던 것이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인 회사가 감사위원회를 구성하는 이사(감사위원)를 선임하는 데까지 확장된 것이다. 감사위원은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사이므로 지배주주에 의한 이사 선임을 통제하는 강력한 장치다.

더욱이 이번에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까지 동시에 추진돼 이사회 구성과 운영에 대한 근본적인 숙고는 물론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법률이 이사회 구성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는 것은 감독이 선수로 뛰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선수가 그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되새겨야 한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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