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일 창단 28년만에 내한공연
“이번 공연은 우리의 뿌리와 연결
역사적 고난을 넘어선 화해·연대
민족적 자긍심을 되새기는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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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 고려인 합창단 ‘비단길’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이달 처음 고국을 찾아 공연을 선보인다. 사진은 바단길의 공연(위)과 연습 모습 [알마티 고려문화원 제공] |
“한국의 흙을 가져와 부모님 산소에 뿌렸다. 할머니에게 배운 노래, 그 노래를 이제 한국에서 부른다.”(고려인 임 리야·72)
조국(祖國).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곳이지만 그들에게 이땅은 여전히 조국이다. 남녘이든 북녘이든 죽어서라도 이 땅에 묻히길 바란 어머니와 아버지들, 그 아들과 딸들도 하염없이 늙어 이제 노인이 됐다. 이역만리 고된 삶을 견뎌낸 부모가 부르던 ‘아리랑’을 노인이 된 그들이 따라 부른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합창단 ‘비단길’ 이야기다. 오는 11일 이들의 노래가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울려퍼진다. 광복 80주년 기념 공연이다. 한국에서 공연은 합창단이 결성된 지 28년 만에 처음이다.
단장 김 베라 이바노브나(85), 지휘자 박상원(70), 황 루드밀라(75), 이 타티야나(73), 최 발렌티나 콘스탄티노브나(72), 김 류보브(77), 임 리야, 김 볼가 니콜라예브나(70), 혜가이 베라 트라브도브나(70), 이 빅토르(70), 김 볼가 니콜라예브나(70), 이 타티아나(72)…. 한국을 방문하는 16명의 고려인은 저마다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있다. 헤럴드경제는 최근 고국 방문을 앞둔 비단길 단원들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동섭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 상임이사, 김상욱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문화원장이 인터뷰를 도왔다.
“나의 부모님은 극동 지역,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지방에서 살았다. 1937년 강제 이주를 당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다. 우리 가족이 탑승한 열차는 크질오르다 지역에 남겨졌다. 부모님은 벼농사를 지으며 버텼다. 1940년 7월 22일 내가 태어났다. 나는 세미팔라틴스크 친척집으로 보내져 거기서 교육을 받았다.”(김 베라 이바노브나)
“아버지 이운호는 남한 출신이다. 나는 1952년 9월 14일 탈디코르간주 카라탈 지역 우슈토베시에서 태어났다. 우리 부모님은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자녀들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줬다.”(이 타티야나)
다른 단원의 생애도 비슷하다. 강제이주 조치로 연해주 동포의 삶은 뿌리째 뽑혀 나갔다. 부모들은 핏덩이를 안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흩어졌다. 2021년 8월 15일 유해가 봉환된 홍범도 장군(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 추서)도 이때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당했다.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수위장, 정미소 노동자로 살았다. 그의 유언도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꼭 고국에 데려가라”였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1937년 연해주의 우리 동포 17만1781명에 대한 강제이주 결정을 내렸다. 일본의 간첩 행위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의 독립적인 성격을 억압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이들은 그해 9월부터 11월까지 시베리아 횡단 화물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카자흐스탄에는 9만5256명이, 우즈베키스탄에는 7만6626명이 각각 정착했다(당시 니콜라이 예조프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의 1937년 10월 25일자 보고서).
출발한 화물열차는 30~40일을 달렸다. 이동 환경은 열악했다. 식사와 먹을 물이 부족했고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554명이 이동 중 사망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카잘린스크, 야니 쿠르간, 아악추빈스크…. 열차가 멈추는 곳은 이들이 살아야 할 곳이 됐다. 고려인 역사학자인 보리스 박러시아 동방학연구소 명예교수(1931~2010)는 저서 ‘러시아에서의 140년간’을 통해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화물 칸에는 창문 하나 없었으며, 문만 있었을 뿐이다. 문이 닫히면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밖에서는 이 열차로 가축을 나르는지 사람을 나르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기차를 그냥 ‘검은 상자’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박혜숙, 할아버지는 티안 연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소련 장교로 복무 중 1937년 실종됐다. 그해 아버지와 할머니는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수십 년 후 할아버지가 복권되면서 할머니가 특별 연금을 받게 됐다.”(혜가이 베라 트라브도브나)
살아남은 사람은 끊질기게 벼텨냈다. 황 루드밀라, 박상원, 이 타티야나, 김 류보브 등 단원들의 부모가 모두 그랬다. 버티고, 버텨 결국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렸다. 이역만리에서도 공동체는 만들어졌다. 김상욱 원장은 “설날·한식·추석 외에도 광복절·삼일절·순국 선열의 날 행사를 함께하며 고려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며 “김치·된장국·시래깃국을 먹고 돌잔치·환갑잔치를 하며 부모들로부터 배운 우리의 풍습을 후세대에게 물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민족적 자부심은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후손들은 연해주와 만주 벌판을 누비던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들은 여전히 당시 일본군을 ‘왜놈’이라고 불렀다.
“누구는 홍범도 장군의 부대원이었고, 누구는 한창걸(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지사의 부대원이었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실제로 많은 우리 부모 세대는 왜놈(일본군)과 한패가 된 러시아 반혁명세력(백파)과 총을 들고 싸웠다고 했다. 고려인들은 주먹밥을 해서 주기도 했고, 솜바지를 바느질해서 전해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듣고 자랐다.”(임 리야)
조국의 위상이 높아질 수록 이들은 긍지를 느꼈다. 카자흐스탄 곳곳에 놓이는 한국 제품을 볼때마다, 한류 열풍을 느낄 때마다 그랬다.
“자동차뿐 아니라 전자기기, 가전제품, 식품 등 카자흐스탄 상점의 한국 제품들은 우리에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안겨준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위상과 발전이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기쁨과 긍지를 동시에 준다.”(이 빅토르)
“한국은 번영하는 나라다. 자랑스럽다. 올해 6월 한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다. 앞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황 루드밀라)
이국에서도 교육열을 막을 수는 없었다. 주카자흐스탄대사관이 2007년 작성한 보고서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의지의 한국인들’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은 소련 전체 평균의 두 배가 넘는 25% 수준이었다. 1990년대 중반 실시한 조사에서도 고려인의 전문학교 이상 진학률은 52%, 대학교 이상의 학력 소지자는 전체 고려인의 35%에 달했다. 고려인 중에는 정계, 학계, 의학계 등 전문직과 사무직 종사자가 48%였다.
비단길 단원들 역시 고등교육을 받았다. 혜가이 베라 트라브도브나씨는 카자흐외국어대를 졸업한 뒤 중학교와 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임 리야씨와 황 루드밀라씨도 경제학자로 일했다. 이 빅토르씨는 회계사가 됐고, 이 타티야나씨는 자원소방협회장으로 근무했으며, 최 발렌티나 콘스탄티노브나씨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했다.
이들은 어머니가, 아버지가 부르던 고향 노래를 듣고 자랐다. 부모가 부르는 ‘아리랑’은 고려인 2세와 3세의 정체성이 됐다. 김상욱 원장은 “구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소련 내 전통문화 부흥 활동과 모국어 활동을 하게 되면서, 고려인들은 1989년 가장 먼저 알마티고려문화중앙회의를 결성했다”며 “이후 우리의 전통가요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김 베라 이바노브나 단장과 신 브로니슬라브 전 알마티 시의원의 노력으로 1997년 비단길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비단길은 27년동안 매년 광복절이 되면 조국을 노래했다. 연습은 매주 두 차례 진행됐다. 2019년에는 처음으로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김상욱 원장이 비용을 지원, 한국에서 한복을 맞춰 선물했다.
비단길은 김 베라 단장과 사할린 출신의 고려인 음악감독인 지휘자 박상원 씨가 이끌고 있다. 지난해에는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국립합창단’ 칭호를 받았다. 조국 공연의 오랜 꿈을 들은 이동섭 상임이사가 추진해 현실이 됐다.
비단길은 이번 무대에서 ‘아리랑’을 비롯해 ‘한많은 대동강’ ‘쟈크슨다(카자흐스탄 노래)’ 등을 부른다. 이번 공연에는 고려인 공훈 예술가인 김 겐나지 씨와 문공자 씨도 함께한다. 한국에서는 가수 손병휘, 밴드 산오락회 등이 출연한다. 공연은 오는 11일 국회도서관에 이어 12일 경기 안산시 고향마을복지관, 14일 광주 광산구 다모아어린이공원에서도 진행된다. 안산시 선부동은 고려인이 밀집해 살고 있는 곳이다. 광산구에도 고려인이 많이 산다. 특히 다모아어린이공원에는 고려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번 공연은 나의 뿌리와 연결이다. 내가 한국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리 조상들과 문화에 대한 존경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비록 한국은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있지만 민족적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최 발렌티나 콘스탄티노브나)
“조국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는 사실에 기쁨과 동시에 긴장감을 느낀다. 나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한국인들이 우리 고려인을 따뜻하게 맞이해 줬다. 더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다.”(이 빅토르)
이번 공연은 사랑의 연탄나눔운동, 알마티 고려문화원이 공동 주관한다. 김영진·박홍근·이용선·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공동 주최한다. 또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항일혁명가기념단체연합이 후원에 나섰다.
주최 측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고려인의 목소리가 다시 고국에서 울려 퍼지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며 “역사의 고난을 넘어선 화해와 연대, 민족적 자긍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총칼을 들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을 지원한 숨은 영웅들, 그분들의 후손들이 100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아 한국 사회와 역사적 연대를 다시 잇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박병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