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상간·성병 나오는 ‘고품격 막장극’…“입센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숙제 담겨” [인터뷰]

26일까지 양손프로젝트 ‘유령들’
닻 올린 입센 3부작 첫 작품 열연
인간이 감당할 과거·현재·미래 담겨

 

입센 3부작 중 첫 작품 ‘유령들’로 돌아온 양손 프로젝트 양종욱, 양조아, 박지혜 연출, 손상규 [LG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유령이다. 그들이 살아 돌아왔어.”

끊임없는 존재의 압박, 숨통을 조이는 관습, 강요를 일삼는 종교적 규범….

새하얀 무대에 검은 복장의 배우들이 선다. 흰 도화지에 찍힌 검은 점처럼 수백개의 백돌 속에 자리한 흑돌처럼 도드라진 사람들. 일부러 거리두기를 해도 끊기지 않는 인연의 고리로 매듭지어졌다. 밀고 당기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동선 위로 한 치의 오차없이 치고받는 대사의 향연. 5명의 역할을 나눠서 하는 세 배우는 관객을 19세기로 데려간다.

이곳은 노르웨이 시골 마을의 어느 대저택. 등장인물은 총 5명. 연극은 19세기판 고품격 막장극이다. 이야기의 핵심은 헬렌 알빙 부인이 쥐고 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써 타락한 삶을 살다 간 남편의 치부를 숨기려 아등바등 버텼고, 아버지의 방탕한 DNA를 물려주지 않으려 아들을 일찌감치 유학 보낸 아내이자 엄마다. 하지만 현실은 혹독하다. 이복누이에게 어긋난 욕망을 품은 데다 ‘선천성 매독’까지 안고 돌아온 아들 오수왈과 하루를 보내며 알빙 부인은 사라지지 않고 습격하는 ‘유령들’을 마주한다.

시대를 도발하는 이야기꾼이었던 입센의 ‘유령’(1881)을 재해석한 양손프로젝트의 ‘유령들’(10월 26일까지, LG아트센터). 앞으로 3년간 이어질 ‘입센 3부작’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다. 연극계 히트 메이커, 양손프로젝트는 연출가 박지혜와 배우 손상규·양조아·양종욱이 함께 하는 공동 창작 단체다.

최근 LG아트센터에서 만난 양손프로젝트는 “입센은 날카로우면서 군더더기 없고, 미사여구나 장식적 표현없이 하고 싶은 얘기로 직진한다”(손상규)며 “이 안엔 인간이 감당하고 풀어야 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숙제가 담겼다”(양조아)고 했다. 이 작품에선 성병, 근친상간, 안락사 등 당대는 금기하고 쉬쉬했던 소재들이 등장한다.

작품은 네 사람이 오랜 시간 머리를 맞대고 앉아 각색의 과정을 거쳐 태어났다. 옛 어투가 빼곡한 어려운 번역본은 일상 어투로 바꿨다. 박지혜 연출가는 “우리가 실제로 주고받는 말이어야 감각적으로 와닿을 거라 생각했다”며 “민감하고 금기시된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부분도 직설적으로 바꿨다”고 했다. 매독이라는 대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유령들’의 노르웨이어 원제는 ‘Gengangere(갱강어, 돌아오는 자)’다. 입센의 희곡에선 ‘사라지지 않고 돌아오는 현상’, 현재의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당대의 관습, 관념, 종교 등이나 과거의 잔재를 의미한다.

끈질기게 괴롭히는 유령들을 벗어나기 위해 알빙 부인은 남편의 이름을 딴 보육원을 짓지만, 개원 전날 평지풍파가 몰아닥친다. 지독하고 징그럽다. 떨쳐내려 해도 할 수 없는 구습과 규정들은 현재의 삶을 놓아주질 않는다. 오수왈과 보육원 공사에 참여한 목수 엥스트란드(오수왈 이복누이 레지나의 양부)를 연기하는 손상규는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들, 자유를 구속하는 사회적 시선이나 관습처럼 실체는 없지만 영향을 받게 되는 것들이 유령들”이라고 했다.

입센 3부작 중 첫 작품 ‘유령들’로 돌아온 양손 프로젝트 양종욱, 양조아, 박지혜 연출, 손상규 [LG아트센터 제공]

텅 비워진 무대에서 배우들은 숨을 곳이 없다. 객석으로 채운 4면의 무대, 심지어 그 위에 놓인 도구라곤 길이가 서로 다른 의자뿐. 모든 장면에서 배우들은 내던져져 연기로 증명한다. 손상규는 “꼭 필요한 것들만 넣어 쓸 수 있는 것을 쓰고자 했다”며 “전체 스토리보다 인물들의 관계나 캐릭터가 더 잘 보이기를 바랐다”고 했다.

비워낸 무대에선 배우들의 연기도 더 선명히 드러난다. 이야기의 열쇠를 쥔 얼빙 부인을 연기하는 양조아는 19세기 여성을 21세기로 데려와 자연스러운 ‘요즘의 언어’로 연기한다. 그는 “사회에 순응하다 어느 순간 자각을 하게 되는 인물”이라며 “내면을 감추고 보호하면서도 자극과 억압의 힘에 무력화하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인물로 그렸다”고 했다.

내내 담담하고 차분하게 극을 끌고 가다, 구습과 구악을 진리라 믿어 울화통이 터지게 하면서도, 어리석을 만치 순진해 빠진 만데르스 목사를 대하는 장면 장면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압권이다. 양조아는 “1면 무대일 땐 잠깐 뒤돌아서 콧물이라도 닦을 수 있는데 4면 무대는 숨을 데가 없어 알빙 부인이 느꼈을 압박과 시선에 더 가깝게 다가서게 된다”고 했다.

고전이 원작인데다 화려한 볼거리도 없지만 ‘연기의 힘’으로 밀어붙인 작품은 현재의 관객과 소통하기에 무리가 없다. 희곡 속 지문을 그대로 읽어내는 흥미로운 연출 방식도 신선하다. 배우들은 ‘오스왈 퇴장’, ‘레지나 퇴장’ 등 지문까지 소화해, 보통의 무대에선 볼 수 없던 대본 속 활자를 경험하게 한다.

만데르스와 레지나를 연기하는 양종욱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뒤, 지문을 말하며 터져 나오는 분노를 쏟아내는 것도 흥미롭다. 양종욱은 “어떤 서술어(지문)를 발화했을 땐, 그 이미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특정한 종류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힘과 미덕이 있다”고 했다.

양손프로젝트는 그간 3부작 시리즈를 통해 한 작가의 작품을 깊이 탐구해 왔다. 다자이 오사무, 현진건, 모파상, 김동인에 이어 이번엔 입센이다. 박지혜 연출가는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만났을 때 그 작가가 가진 세계관을 좀 더 여러 층위에서 바라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연극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인 입센을 다룬다는 것은 양손 프로젝트에도 특별한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령’에 이어 다음 작품으로는 ‘들오리’, ‘민중의 집’이 내부에서 후보군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아직 두 번째 작품이 결정되진 않았다.

박지혜 연출가는 “우리 안에서 각자 삶의 주제와 이슈들이 입센과 만나게 된다”며 “때에 따라 달리 다가올 텐데 어떤 작품을 새롭게 나로서, 우리로서 만나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발견해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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