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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산둥성 칭다오항에 지난 1월 4일 외국 무역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선이 정박해 있는 사진과 세계무역기구(WTO),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로고를 챗GPT를 활용해 시각화한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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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분수령의 해
경제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2025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왔던 규칙 기반 글로벌 무역 질서가 사실상 막을 내린 해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 체제는 이미 상당 기간 압박을 받아왔고, 변화하는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거나 대응하지 못하면서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이 특별한 이유는, 기존 질서에 대한 공격이 다름 아닌 이 시스템의 설계자였던 미국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도입한 이른바 ‘상호 관세(reciprocal tariffs)’는 비차별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조치이자, 다자간 규칙 기반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다. 비차별 원칙은 전후 무역 체제의 핵심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그리고 이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도화된 최혜국대우(MFN) 조항에 따르면, 회원국이 특정 교역 상대국에 관세 인하와 같은 유리한 조건을 부여할 경우, 그 혜택은 모든 교역 상대국에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 이 원칙은 무역 환경의 투명성·안정성·예측 가능성을 보장하고, 교역 상대국 간의 평등을 담보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WTO에서 약속한 MFN 관세율 위에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게 되면서, 세계 최대 경제국의 MFN 원칙 준수는 사실상 붕괴됐다. 더욱이 IEEPA에 따른 관세는 일률적이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지정학적 상황, 급변하는 양자 협상, 현지 여건에 따라 수시로 변동되면서 무역 환경은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하고 불확실해지고 있다. 이는 ‘규칙에 기반한 질서’에서 ‘힘에 기반한 질서’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다만 MFN 원칙이 완전히 사망했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일 수 있다. 여전히 전 세계 상품 교역의 80% 이상이 MFN 조건하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WTO 역시 여전히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규칙 제정 기능에 있어서는 더 이상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당분간 향후 전개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변화들이 특히 소규모·중견 수출 지향 경제국에 치명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 국가가 미국이 남긴 리더십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규칙 기반 무역 질서 형성에 앞장설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이들 국가의 번영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하는 고무적인 신호와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으며, 여러 아시아의 중소 규모 국가들이 새로운 형태의 규칙 기반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CPTPP를 지렛대로 삼다
아시아와 관련해 특히 주목되는 이니셔티브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다. 이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개편한 버전이다. 흥미롭게도 TPP는 2006년 브루나이, 칠레,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 4개 소규모 경제국 간의 비교적 소박한 협정으로 출발했다.
이후 미국이 협상에 참여하면서 협정은 점차 확대됐고, 말레이시아, 호주, 페루, 베트남, 멕시코, 캐나다, 일본 등 7개국이 추가로 합류해 총 12개국이 참여하는 야심차고 포괄적인 메가 FTA로 발전했다.
미국이 2017년 탈퇴했음에도 협정은 붕괴되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의 주도로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비준됐다. CPTPP가 지난 20년간 가장 중요한 자유무역협정으로 평가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협정은 전통적인 FTA보다 훨씬 넓고 깊은 수준의 약속을 담고 있으며, ‘새로운’ 이슈와 ‘국경 이면(behind the border)’ 규범에 있어 WTO보다 한발 앞서 있다. 총 30개 장(chapter)은 관세 철폐 같은 전통적 조항뿐 아니라 디지털 무역, 환경 보호, 노동 기준 등까지 폭넓게 포괄한다.
이 협정은 신규 가입국에 열려 있으며, 영국이 2024년 최초로 공식 가입국이 됐다. 중국과 대만, 여러 동남아 국가들을 포함한 다수의 공식 가입 신청은 CPTPP의 높은 매력도를 방증한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와 미·중 경쟁이 심화되는 현 상황에서, EU 역시 이해관계가 맞닿아 있다는 이유로 CPTPP 회원국들과의 협력 강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EU가 CPTPP에 직접 가입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CPTPP와의 제도적 정합성을 높이는 것은 규칙 기반 무역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도전에 맞춰 무역 규범을 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그룹의 연대는 새로운 규칙 기반 무역 질서를 형성하는 핵심 축이 될 수 있다. 덧붙이자면, 대외 개방적인 중견국인 한국 역시 이 그룹에 참여할 분명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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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국(plurilateral)간 협정의 부활
WTO의 약점이자 점진적 무력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새로운’ 이슈를 규범에 포함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는 방안으로 복수국 간 협정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복수국 간 협정은 뜻을 같이하는 일부 국가들이 모든 WTO 회원국의 만장일치 없이도 새로운 규칙과 더 깊은 통합에 합의하고 전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협정들은 궁극적으로 합의된 규범을 이행할 의지가 있는 모든 국가에 개방된다. 이러한 개방형 복수국 간 협정은 과거 GATT 체제에서는 널리 활용됐지만, WTO 체제에서는 합의(consensus) 원칙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 결과, 새로운 유형의 복수국 간 협정은 WTO 바깥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규칙 기반 질서를 유지하려는 국가들은 이러한 복수국 간 협정을 활용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디지털 무역은 대표적인 분야이며, 경제 안보와 공급망 회복력 역시 이러한 접근이 가능한 영역이다.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은 소수 국가가 출범시킨 복수국 간 이니셔티브가 향후 다자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DEPA는 2020년 칠레, 뉴질랜드, 싱가포르가 체결한 협정으로, 디지털 무역을 다룬 최초의 협정이다.
무역을 제한하는 정책을 완화하고, 국경 간 데이터 이동, 전자서명, 국경 간 결제 규범 등 디지털 무역 촉진을 지원하며, 서로 다른 규제 체계 간 상호운용성을 제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국은 2024년 DEPA에 가입했으며, 현재 중국, 캐나다, 코스타리카, 페루, 아랍에미리트(UAE), 엘살바도르, 태국, 우크라이나, 우루과이 등 9개국이 추가 가입을 신청한 상태다.
미국이 자신이 구축하는 데 기여했던 규칙 기반 무역 체제를 사실상 포기했다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안정적인 규칙 기반 질서를 필요로 하는 중소 무역국들은 집단적으로 행동하며 개편된 무역 체제를 조직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국가들이 여기에 동참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미국이 다시 이 체제에 복귀하려는 시도조차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고등연구원에서 정치학 석사(1985년) 학위를, 국제경제학 박사(1991년) 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에 연구원으로 합류했다. 2024년 2월까지 아시아연구센터 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같은 센터의 수석고문이며, 시앙스포(파리 정치대학) 파리, 시앙스포 리옹에서 강의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재정·조세·기업국(DAF)의 자문위원으로서, 동남아시아 비회원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9년 싱가포르 동남아시아연구소(ISEAS), 2004년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연구 활동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