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데 왜 반납?”…전국은 고령운전에 깊은 고심[면허증 전쟁]

1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을 찾은 김성훈(80) 씨가 운전면허 갱신을 위해 필요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김 씨는 “자녀들은 하나같이 더는 운전하지 말라고 말라는데, 일상생활을 위해 운전은 필수다”라고 말했다. 안효정 기자

[헤럴드경제=이세진·안효정 기자] “가족들은 아주 말리고 난리지. 자식들이랑 있을 땐 절대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내랑 둘만 있을 땐 내가 운전해서 나가야지 어떡해. 차 없으면 불편하잖아.”

검정색 패딩 차림의 김성훈(80) 씨는 지난 1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면허시험장을 찾았다. 곧 만료를 앞둔 운전면허증을 갱신하기 위해서다. 면허시험장에 오기 전 보건소에서 받은 인지선별검사는 가뿐히 통과했다. 돋보기를 쓰고 서류에 글자를 꾹꾹 눌러담으면서 그는 “가족들이 걱정은 많이 하는데, 노년 생활에도 운전이 필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령운전 시대’ 막이 올랐다. 급속히 고령화되는 인구구조 속에서 자연스레 ‘고령운전자’들이 많아진 결과다. 지난해 기준 만 65세 이상 면허 보유자는 5년 전에 비해 42%나 늘었다. 신체나이도 젊어지고, 노년이라는 사회적 인식도 나이대가 예전보다는 올랐다지만 도로 위 불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고령운전자 교통사고도 빈번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각 가정들이나 행정당국, 의료기관 곳곳에선 ‘면허증 전쟁’이 벌어지는 중이다. 경찰서 민원실엔 “제발 우리 아버지 면허 좀 거둬가 달라”는 자녀들 상담이 빗발친다. 부모의 완고한 뜻을 설득하다 못해 가정 불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잦다. 민원을 상대하는 보건소와 민간병원들도 시름이 깊다. 그렇지만 노인들도 수십년간 발이 되어줬던 자가용을 포기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경찰과 지방자치단체는 운전면허 자진 반납을 장려하고 있지만 반납률이 여전히 2%대에 머물러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집중 못했어, 검사 다시 해줘!” 실랑이…“네 탓”에 병원도 검사 포기

기자가 찾아간 서울 서부면허시험장에는 매일 10~20여 건의 고령운전자 면허 갱신 민원이 접수된다. 연초지만 연말이 되면 훨씬 많은 사람이 몰린다고 한다. 짜증이나 신경질을 내는 사람도 종종 있다.

1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 접수대 모습. 안효정 기자

면허시험장에서 만난 또 다른 80대 고령운전자는 면허를 갱신하기 위해선 먼저 인지선별검사를 예약해 실시한 뒤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왔다가 허탕을 쳤다. 서울 서부면허시험장에서는 보건소 치매안심센터와 연계한 인지검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는 발걸음을 돌리면서 “완전 짜증이 난다. 걸어서 휙휙 다닐 수 있는 나이가 아니지 않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그러니까 차를 몰고 다니려는 것이다. 노인 되면 병원 갈 일도 많다”고 푸념했다.

갱신 서류를 접수한 백모(78) 씨는 “사지 멀쩡하면 운전 하는 거 아닌가. 운전 경력만 40년이 훌쩍 넘고, 사고 한번 낸 적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지 대화가 수월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인지선별검사를 진행하는 보건소 치매안심센터도 고령 운전자들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은 마찬가지다. 서울 은평구 보건소 담당 직원은 “어르신들이 점수 미달이 나오면 화를 많이 낸다. 육두문자 날리며 항의하는 분도 있다”고 말했다. 종로구 보건소 직원은 “집중을 안 해서 점수가 낮다, 검사를 다시 해 달라고 하는데, 문제가 노출돼서 그럴 수는 없다”면서 “사설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도록 안내한다”고 설명했다.

경찰과 도로교통공단 등에 따르면 만 65세 이상 고령운전자들에게는 기존 10년 주기인 적성검사가 5년으로 짧아진다. 75세부터는 매 3년마다 적성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때 운전자의 치매 여부 등을 판별하는 보건소 인지선별검사가 필수적으로 진행된다. 병·의원에서의 검사도 가능하다. 또는 보건소에서 점수가 미달됐을 때 일반 병·의원에서 한 번 더 ‘재검’을 받아볼 수 있다. 통과하면 그 결과를 근거로 면허시험장에서 갱신 신청을 접수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실랑이는 병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부산시 동래구 소재 한 신경과 의원은 작년 말부터 보건소와 연계해서 진행해 오던 인지검사를 중단했다. 이 병원 원장은 통화에서 “검사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는데, 본인이 운전을 할 수 있는지 또는 할 수 없는지 소견서를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면허 갱신이 안 되면 모든 걸 병원 탓으로 돌리는 상황이 버거웠다”고 말했다.

도로 위 고령운전자 475만 명…교통사고 치사율 2%대

운전면허를 보유한 고령인구는 해마다 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65세 이상 운전면허 보유 인구는 474만7000여 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5년 전인 지난 2019년 333만7000여 명에서 42% 가량 급증한 규모다. 인구 고령화 추세를 감안해도 크게 늘어난 수준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65~69세의 면허 보유자가 246만여 명, 70~74세는 129만여 명, 75~79세가 65만여 명이었고, 80세 이상도 36만여 명이나 됐다.

고령운전자 교통사고도 급격히 증가했다. 지난 2021년 3만2000여 건이던 사고는 지난해 3만9000여 건(잠정치)으로 집계되고 있다. 65세이상 고령 운전자 전체 수가 늘어나면서 이들이 일으키는 사고 역시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교통사고 시 사망자가 발생하는 비율인 교통사고 치사율은 2%대 안팎으로, 1%대 초중반에 머무르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다.

면허 반납률은 수년째 2%대에 머무르고 있다. 최근에는 2%대 중후반으로 미세하게 올랐지만 절대적인 면허소지자 규모가 커 그 효과는 미미한 수준으로 보인다. 지역별로는 대중교통 사용이 상대적으로 편리한 서울과 부산, 대구, 인천, 경기 등 대도시·수도권에서 상대적으로 반납률이 높다.

자진반납률 2%대에 불과…인센티브 국고보조금 예산도 동결

면허 반납률이 여전히 낮은 데에는 자진 반납자에 주어지는 인센티브 혜택이 적은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경찰과 지자체는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인센티브 지급 등을 알리고 있지만 효과는 제한적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결국 ‘돈’의 문제다.

인센티브 지급 금액은 지자체별로 다소간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10만원 상당의 교통카드, 지역화폐, 온누리상품권 등을 지급한다. 이마저도 일회성 지급에 그친다. 이 때문에 면허 보유자들에겐 의미있는 유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센티브 국고보조금 예산도 동결됐다. 정부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경찰청의 면허 자진반납자 인센티브 지급 예산으로 18억원을 편성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보통 반납자에게 지급되는 지원금 10만원 중 경찰청 예산이 3만원, 지자체 예산이 7만원씩 분담된다. 예산 18억원은 단순 계산으로 6만명 분으로, 작년 11만여 명이 면허를 반납했는데 그 중 절반 가량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라고 설명했다.

경찰은 예산 확대를 추진하는 한편 고령자 면허 반납 기준을 폭넓게 적용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기존에는 자진반납이 아니면 면허가 갱신 기간을 지났거나, 인지검사에서 미달돼 갱신 불가한 경우 등에 면허가 소멸됐다. 경찰청은 여기에 직계가족이 고령자가 운전을 할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사유에 대한 합당한 증명을 제출하면, 대상자를 수시적성검사 대상자로 적극 분류하는 방침을 검토 중이다.

수시적성검사 대상자는 운전적성판정위원회의 판단 대상에 올라 면허 갱신이 불허될 수 있다. 경찰청은 “그동안 면허자 본인의 자진 반납을 유도했던 것에서 나아가, 적극행정을 통해 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나은 고령 면허 보유자들을 찾아 선제조치하겠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적극적으로 고령운전자를 규제하기 위한 조치들이 시행 중이다. 일본은 지난 2017년부터 고령운전자 사고 방지 기능을 갖춘 ‘서포카S’를 도입하고 보조금을 통해 차량 교체를 지원해 왔다. 이 차에는 장애물 감지 센서를 통해 비상 자동 제동장치와 급발진을 막는 억제장치가 탑재돼 있다.

미국과 독일 등에선 ‘조건부 면허제도’가 도입됐다. 운전자의 운전능력에 따라 거리나 시간, 속도 등을 구체적으로 제한한 면허를 발급하는 것으로, 정부에서도 연구개발(R&D)을 통해 제도 시행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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