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고독 뚫고 나온 빨간 구두…이소라의 ‘파스텔톤 위로’ [고승희의 리와인드]

이소라, 8번째 봄 콘서트 ‘봄의 미로’
오롯이 목소리로만 채운 120분,
“입술에 색 입히고 빨간 구두 신었죠”


이소라 ‘봄의 미로’ [NHN링크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봄은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누군가에겐 너무도 더디게 당도한다. 봄은 소생의 계절이라 화창한 색채로 빛나지만, 어떤 이에겐 기억과 상실을 되살리기도 한다. 이소라의 봄은 미로를 걸었다. 사랑과 실연, 기억의 미로였고, 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감정의 미로였다.

고풍스러운 대학 건물 사이를 지나 평화의전당 앞에 다다르자, 들쑥날쑥해 보이는 연령대의 관객들이 입장을 위해 둥그렇게 줄을 섰다.

때마침 봄비가 내리는 날, 가수 이소라의 여덟번째 봄 콘서트 ‘봄의 미로’(5월 2~3일, 경희대 평화의전당)가 시작됐다. “비처럼 사랑을 부르는 봄비처럼”(‘바라 봄’) 아득한 기억을 부르듯 이소라는 첫곡 ‘바라봄’을 부르며 ‘시간의 미로’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계절을 상징하면서도 누군가를 ‘보는 행위’ 자체를 담아낸 이 중의적 곡을 시작으로 이소라는 오랜 팬들을 자신의 내밀한 세계에 초대했다.

이소라의 콘서트는 ‘없는 것’이 더 많은 공연이다. 화려한 LED영상이나 자극적인 장치는 배제됐다. 간간히 노래에 맞춰 영상이 등장했고, 공중에 매달린 투명 직사각형 구조물에 봄꽃을 담아 대형 꽃바구니가 시각적 장치의 전부였다. 한국 관객의 상징같은 ‘떼창’도 없다. 이소라의 공연은 오롯이 ‘듣는 공연’이다.

공연은 잘 다듬어진 유럽의 정원을 연상케하는 무대 위로 16인조 현악오케스트라와 5인조 밴드가 자리했다. 그 앞으로 앉은 이소라는 자신의 목소리를 수시로 체크하고, 보면대의 악보를 넘기며 가만히 노래했다.

이소라 ‘봄의 미로’ [NHN링크 제공]


100분간 이어진 18개의 노래는 봄, 상실, 방황, 체념을 거쳐 다시 살아가는 사람의 여정을 정교하게 밟아간다. 첫 곡 ‘바라봄’을 마친 이후 이소라는 예고라도 하듯 “지금 박수와 함성을 많이 보내줘야 한다. 공연이 시작되고 슬픈 노래들이 이어지면 소리지를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봄의 미로’는 낭만의 계절은 아니었다. 감정의 지층을 파고드는 고고학적 구조로, 이소라의 30년 음악 세계관을 압축하는 노래들이 이어졌다. 그의 커리어를 순차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미로처럼 얽힌 시간 속을 헤매며 각 시대의 이소라를 만나게 됐다.

자아 성찰과 운명론적인 고독을 노래하는 ‘트랙 9(Track 9)’, ‘포춘 텔러(Fortune Teller)’에선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날 때부터, 슬픈 운명이 정해진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는 이소라 음악 세계의 중심축 같은 곡이다. 사랑의 부정과 긍정 사이를 오가는 화자의 심경이 공기같은 음성에 실려 왔다. 사랑의 부재를 확인하면서도 관계를 놓지 못하는 감정이 절절하다. 이미 떠났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마음을 붙드는 사람의 독백은 이소라의 노래를 관통하는 핵심 서사다. 그의 음악은 언제나 사랑의 설렘과 기쁨이 아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담는다.

외로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진다. ‘그대가 이렇게 내 맘에’, ‘봄’, ‘별’, ‘트랙11’로 이어지는 흐름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의 더욱 짙어지는 외로움을 포착한다. ‘눈을 뜨면 멀리 사라지는’(‘봄’ 중) 꿈 같은 사랑의 속성을 목소리의 잔향만으로 전달하는 이소라의 감성은 여전했다. 그는 절규하지 않으면서도 청중을 천천히 침잠시킨다. 긴 밤을 유영하는 생각의 끈을 조용히 따라가듯 그의 목소리는 내내 여운을 흘린다. ‘마음을 내려놓을 곳을 찾아 해메’는(‘트랙 11’ 중) 모두의 외로움이 저마다의 궤도를 찾아가게 한다.

이소라 ‘봄의 미로’ [NHN링크 제공]


그의 공연이 ‘봄의 미로’인 것은 사랑과 인생은 직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발견의 과정’이다. 미로에 갇히는 것도 미로를 벗어나는 것도 결국 자신의 선택이다. 그는 음악으로 내면의 중심을 찾으며 미로를 빠져 나간다.

내내 침참하는 노래들이 이어지다 ‘그대와 춤을’, ‘청혼’을 통해 리드미컬한 선율 덕에 숨구멍을 찾는다. 이내 사라질 봄이라는 걸 알면서도 ‘찰나의 약속’은 늘 미로 속을 밝히는 찬란한 불빛이다.

이날 공연에선 이소라의 초기곡인 ‘난 행복해’와 ‘처음 느낌 그대로’도 다시 불렸다. 알록달록한 색채와 호흡의 초창기 이소라와 달리 세월이 내려앉은 목소리는 같은 노랫말을 회환과 수용의 정서로 뒤바꿨다. 이전의 ‘난 행복해’가 타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다짐이었다면, 이날의 ‘난 행복해’는 자신을 향한 온전한 위로로 들렸다.

오래도록 ‘은둔자’로 살았던 이소라는 지난해부터 서서히 변화를 맞았다. 그는 “무채색이었던 내게 색깔을 입히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도 화이트 셔츠에 블랙 스커트로 몸을 칭칭 감았으면서도, 빨간 하이힐을 신었다. 같은 옷만 여러 벌 사두고 집에만 머물던 그가 “올해는 해보지 않은 많은 일을 해보고 있다”는 변화를 맞은 것이다.

지난 3월 개설한 유튜브 채널 ‘이소라의 첫봄’이 계기가 된 변화였다. 그는 “유튜브를 하면서 많이 힘들지만 크게 안정도 된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에너지를 받는다”며, 외부와의 소통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늘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이소라의 봄은 이제야 파스텔 빌깔을 입었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지구는 변함없이 돌고 있는데, 나만 홀로 이렇게” 서있는 시간이라도 어제의 고독, 지난 날의 소외와는 다른 오늘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수의 시절’이 아쉽더라도, 그 시절을 애도하며 미로를 빠져나올 힘이 이소라의 내면에 채워졌다. “좀 밝은 사람, 설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이소라의 고백은 이날을 찾는 관객들에게 가장 따뜻한 봄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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