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문일의 세상읽기] 운명은 극복 가능하다

보통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이를 이겨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본다. 안간힘을 써가며 이겨내고 극복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을 경우 운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또 운명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명제를 떠올려 본다. 이 세상에 운명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합리적인 지성을 강조하고 노력에 의한 성취 가능성을 확신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의식 속 깊은 곳에는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운명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 악착같이 일하고 , 악착같이 돈을 벌고, 악착같이 명예를 추구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수록 체념적 운명론으로 후퇴하여 종교에 의지해 스스로를 달래거나 자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항상 주어진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생각해 보라. 이른바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부모 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일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유전인자 안에는 부모의 유전인자 뿐만 아니라 수십만년 전부터 인류가 진화해 내려 오면서 만들어진 갖가지 본능과 습관, 의식 등이 복잡하게 저장돼 있어서 그 유전인자가 우리의 일생을 지배하며 삶을 이끌어 간다.
그렇지만 유전인자가 우리의 운명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우리들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후천적 학습내용, 성년이 된 이후에 스스로의 주체적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각자의 윤리관이나 가치관 등이 덧붙여져 운명을 이끌어 간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통하는 우리의 자의식이다. 자의식은 다시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으로 나뉘는데,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을 일치시킬 수 있을 때 유전인자와 환경적 요인이 결합하여 운명의 코드를 바꿀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인간의 의지력이 운명에 작용하는 힘은 아주 작다. 운명 극복을 위해 의지력에만 헛되게 기댈 경우,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의 괴리는 더욱 커지게 되고 본능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은 점차 위축되고 만다.
표면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억지로 강제된 윤리나 이성이라면 잠재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솔직한 감성 또는 본능인데 잠재의식을 끌어올려 표면의식을 압도할수록 ‘마음’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잠재의식 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진 솔직성이 우리 마음을 덮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 운명은 창조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한 평생 아무런 풍파없이 곱게 지내다가 제 명을 다 채우고 죽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소망일 것이다. 물론 이왕 살 바에야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는 남보다 더 부유하게 살고 남보다 더 권세를 누리고 될 수 있는 한 오래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은 뻔한 이치다. 또한 죽음까지도 초월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의 경우라면, 극단적으로 행복한 운명을 향유하지 못할 바에야 극단적으로 불행한 운명에 빠져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 공통적인 소망으로 되어 있다.
이런 생각은 체념적 운명론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식의 소극적 체념은 운명을 감내하는 효력을 지니지만 운명을 극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물론 이런 소극적 체념의 결과로 얻어지는 인생은 어느 정도까지는 제 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나는 행복을 선사한다. 하지만 누구나 다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진정한 행복이 보장되는 삶은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힘을 무기로 체념적 운명론과 싸워 나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패배적’ 복종심리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모든 불행한 느낌의 근원인 소외의식을 극복할 수 있고 우리 스스로의 주체적 삶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은 극복 가능한 것이니 ‘마음’을 다해 보자.
임문일/ 굿모닝미디어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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