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하건데 한식은 미래 음식문화의 키워드가 될 겁니다. 웰빙식에 대한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식이죠”
미주를 대표하는 한식명장이자 궁중음식전문가 이명숙 쉐프(57). 세계적인 TV쇼 ‘아이언 쉐프’에 출연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유일한 여성이다. ‘한식은 손맛’이라는 통념을 깨고 양념의 계량화 표준화를 통해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서 온 그녀를 오렌지카운티 크라운벨리에 위치한 ‘CIC’ (캘리포니아 요리학교· Culinary Institute of California)에서 만났다.
모든 것은 한식에 대한 무한 애정과 자부심에서 출발했다. 일본유학 중이었던 무용전공자가 돌연 ‘요리사’의 길로 뛰어든 것부터가 그랬다.
이명숙 쉐프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불고기를 ‘호르몬야키’(버리는 내장으로 만드는 구이)라 부르며 비하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맛있다고 먹으면서도 결코 좋은 음식이라고 말하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진짜 한국의 맛이 어떤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사실 한식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신있었다. 3남 2녀 중 장녀였던 그녀는 9살째부터 밥을 짓고 국을 끊였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아버지와 전라도 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자연스럽게 이북음식과 남도음식을 섭렵했다
1986년 스물한살의 나이에 그녀는 20평도 채 안되는 식당을 열었다. 그녀의 손맛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2년만에 오사카 제일의 한식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 식당이 바로 오사카 ‘한일관’이며 지금은 그녀의 언니가 운영하고 있다.
식당이 유명세를 타면서 음식공부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 오사카 유명 요리학교인 쯔지(Tsuji) 아카데미에서 일식 국가자격증을 취득하고 한국으로 가서 궁중요리기능보유자 한복진씨의 문화생이 되어 궁중요리를 배웠다. 그 사이 한일관은 한국과 중국에까지 지점을 열게 된다. 특히 1996년 일본 후지TV의 인기프로그램 ‘아이언 쉐프’의 출연은 그녀를 명실공히 스타쉐프의 자리로 올려놓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최고의 자리에서 이명숙 쉐프는 돌연 미국연수를 택한다. 당시 한식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미국 사회에서 한식의 설자리를 찾고 싶었다.
“나파밸리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의 1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당시 외국에서 온 쉐프들에게 김치담그기와 쌈밥만들기 강의를 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한국이 맛이 세계의 맛이 될수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세계 각국의 음식이 모여 있는 미국에서 한식을 제대로 알리고 싶은 열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남편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우리 러브스토리를 말하자면 2박 3일도 모자라다(웃음)”
연하의 미국인 남편과의 결혼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명숙쉐프는 13년을 변함없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고 있는 남편에게 깊은 감사와 애정을 드러낸다.
2006년 그녀가 출연했던 ‘아이언쉐프’가 미국 푸드채널에서 방송되면서 자연스레 주류사회에 알려지며 ‘한식알리기 프로젝트’는 더욱 힘을 싣게 된다.
‘CIC’를 설립하고 고등학교, 대학교 등을 중심으로 쿠킹클래스를 열어 한식의 우수성을 알렸다. 그녀의 노력덕분에 2008년에는 미국 대학교 최초로 UCLA 교내식당에 한식메뉴가 추가되었다
또다른 공략대상은 외국인 세프들이었다. 그녀는 틈만나면 외국인 쉐프들을 상대로 한식클래스를 열어 조리법을 알렸다. 그들은 또다른 한식 홍보대사로 키운다는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 낸 한식 양념의 계량화 표준화는 이명숙쉐프 30년 요리인생의 커다란 열매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 멕시코, 브라질 등 남미지역의 한국대사관 주최 만찬의 단골 쉐프로, 유명 한식당의 메뉴개발자로, 각종 행사의 쿠킹쇼 진행자로 초빙되는 바쁜 일상이지만 늘 즐겁게 일한다.
“많은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다. 몇 백명이 초대되는 대사관 만찬에는 전에 미나리 장식을 붙이느라 영사부인들이 총 동원된 적도 있다다. 하지만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 힘이 다시 솟는다”
지난해 이명숙쉐프는 유방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치료도 마쳤다. 휴식이 필요할 때지만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오는 4월부터는 ‘OCC(Orange Coast College) ‘에서 매학기 12주 코스의 한식정기 강좌 ‘Korean Cuisine-Beyond the Korean Barbecue’를 맡아 강의에 들어갈 예정이다. 미국 공립학교 최초의 한식요리 정기강좌다.
“한국의 전통적인 지역적인 음식들을 만들고, 맛 보고, 서빙하고, 평가할 것이다. 한국음식의 재료, 맛의 형체, 준비 및 대표적인 요리법이 강좌의 핵심 내용이다. 모든 한식조리방식에 표준을 적용해 통일된 방법과 기술을 정의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목표다”
한식명장, 궁중요리전문가 이명숙 쉐프지만 남편을 위해 소박한 요리를 준비할 때 가장 행복하다. 부부가 가장 즐겨먹는 것은 평양식 순두부된장찌개라고. 그녀가 생각하는 ‘한식의 세계화’도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한식의 한국엄마들도 스파게티쯤은 쉽게 만들지 않나? 세계 각국의 주부들이 불고기쯤은 쉽게 만드는 날이 한식의 세계화가 이뤄지는 날이다. 표준화된 불고기 양념에 고기만 있으면 되는 것이 불고기다. 한국음식이 어렵고 복잡하다는 생각은 우리부터 버려야 한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하혜연기자
미주를 대표하는 한식명장이자 궁중음식전문가 이명숙 쉐프(57). 세계적인 TV쇼 ‘아이언 쉐프’에 출연한 최초의 한국인이자 유일한 여성이다. ‘한식은 손맛’이라는 통념을 깨고 양념의 계량화 표준화를 통해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서 온 그녀를 오렌지카운티 크라운벨리에 위치한 ‘CIC’ (캘리포니아 요리학교· Culinary Institute of California)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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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숙 쉐프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 불고기를 ‘호르몬야키’(버리는 내장으로 만드는 구이)라 부르며 비하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맛있다고 먹으면서도 결코 좋은 음식이라고 말하지 않는 일본인들에게 진짜 한국의 맛이 어떤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사실 한식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신있었다. 3남 2녀 중 장녀였던 그녀는 9살째부터 밥을 짓고 국을 끊였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아버지와 전라도 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자연스럽게 이북음식과 남도음식을 섭렵했다
1986년 스물한살의 나이에 그녀는 20평도 채 안되는 식당을 열었다. 그녀의 손맛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2년만에 오사카 제일의 한식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 식당이 바로 오사카 ‘한일관’이며 지금은 그녀의 언니가 운영하고 있다.
식당이 유명세를 타면서 음식공부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 오사카 유명 요리학교인 쯔지(Tsuji) 아카데미에서 일식 국가자격증을 취득하고 한국으로 가서 궁중요리기능보유자 한복진씨의 문화생이 되어 궁중요리를 배웠다. 그 사이 한일관은 한국과 중국에까지 지점을 열게 된다. 특히 1996년 일본 후지TV의 인기프로그램 ‘아이언 쉐프’의 출연은 그녀를 명실공히 스타쉐프의 자리로 올려놓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최고의 자리에서 이명숙 쉐프는 돌연 미국연수를 택한다. 당시 한식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미국 사회에서 한식의 설자리를 찾고 싶었다.
“나파밸리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의 1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당시 외국에서 온 쉐프들에게 김치담그기와 쌈밥만들기 강의를 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한국이 맛이 세계의 맛이 될수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세계 각국의 음식이 모여 있는 미국에서 한식을 제대로 알리고 싶은 열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남편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우리 러브스토리를 말하자면 2박 3일도 모자라다(웃음)”
연하의 미국인 남편과의 결혼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명숙쉐프는 13년을 변함없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고 있는 남편에게 깊은 감사와 애정을 드러낸다.
2006년 그녀가 출연했던 ‘아이언쉐프’가 미국 푸드채널에서 방송되면서 자연스레 주류사회에 알려지며 ‘한식알리기 프로젝트’는 더욱 힘을 싣게 된다.
‘CIC’를 설립하고 고등학교, 대학교 등을 중심으로 쿠킹클래스를 열어 한식의 우수성을 알렸다. 그녀의 노력덕분에 2008년에는 미국 대학교 최초로 UCLA 교내식당에 한식메뉴가 추가되었다
또다른 공략대상은 외국인 세프들이었다. 그녀는 틈만나면 외국인 쉐프들을 상대로 한식클래스를 열어 조리법을 알렸다. 그들은 또다른 한식 홍보대사로 키운다는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 낸 한식 양념의 계량화 표준화는 이명숙쉐프 30년 요리인생의 커다란 열매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 멕시코, 브라질 등 남미지역의 한국대사관 주최 만찬의 단골 쉐프로, 유명 한식당의 메뉴개발자로, 각종 행사의 쿠킹쇼 진행자로 초빙되는 바쁜 일상이지만 늘 즐겁게 일한다.
“많은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다. 몇 백명이 초대되는 대사관 만찬에는 전에 미나리 장식을 붙이느라 영사부인들이 총 동원된 적도 있다다. 하지만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 힘이 다시 솟는다”
지난해 이명숙쉐프는 유방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치료도 마쳤다. 휴식이 필요할 때지만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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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적인 지역적인 음식들을 만들고, 맛 보고, 서빙하고, 평가할 것이다. 한국음식의 재료, 맛의 형체, 준비 및 대표적인 요리법이 강좌의 핵심 내용이다. 모든 한식조리방식에 표준을 적용해 통일된 방법과 기술을 정의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목표다”
한식명장, 궁중요리전문가 이명숙 쉐프지만 남편을 위해 소박한 요리를 준비할 때 가장 행복하다. 부부가 가장 즐겨먹는 것은 평양식 순두부된장찌개라고. 그녀가 생각하는 ‘한식의 세계화’도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한식의 한국엄마들도 스파게티쯤은 쉽게 만들지 않나? 세계 각국의 주부들이 불고기쯤은 쉽게 만드는 날이 한식의 세계화가 이뤄지는 날이다. 표준화된 불고기 양념에 고기만 있으면 되는 것이 불고기다. 한국음식이 어렵고 복잡하다는 생각은 우리부터 버려야 한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하혜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