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에 나이가 있나…늘 가슴이 뛴다”

70대에 사랑에 빠지는 역할
첫사랑의 감정 떠올리며 연기

예능 ‘꽃할배’로 젊은층과 교감
영화에서도 로맨티스트의 모습
“모든 세대 어울릴 콘텐츠 풍성해야”

사랑하는 사람은 늘 청춘이다. 배우 박근형(75)에게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tvN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이하 ‘꽃할배’) 속 박근형은 로맨티스트다. 아내에게 보여줄 사진을 남기려고 여행 내내 바쁘게 카메라를 든다. 틈이 나면 수시로 안부전화를 걸고, 기념품 가게에선 아내 선물을 공들여 고른다. 영화 ‘장수상회’(감독 강제규ㆍ제작 (주)빅픽쳐/CJ엔터테인먼트)에서 박근형이 연기하는 ‘성칠’ 역시 사랑에 빠져 있다. 앞집 여인 ‘금님’(윤여정 분)에게 반한 그는 “내가 밥도 사는데 ‘예쁘다’는 말까지 해줘야 하느냐”고 투덜대면서도, 이내 그녀에게 “예쁩니다”라는 말을 슬그머니 흘린다.

박근형은 예능과 영화 속 로맨티스트 이미지에 대해 실제 자신과는 거리가 있다고 손사래를 쳤다. 평소엔 아내에게 툴툴거리기도 하고 음식을 두고 타박하기도 하는 남편이라며 쑥스러워했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제야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새로운 작품과 역할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뛴다”고 눈을 빛냈다. 50여 년을 일했지만 여전히 연기자의 삶에 설레는 그는 역시 ‘청년’이었다. 

예능‘ 꽃할배’에 출현하면서 로맨티스트로 불리며 대중에 다가서고 있는 배우 박근형이 그 이미지를 신작 영화‘ 장수상
회’를 통해 다시 선보인다. 박근형은 “연기를 할 때 늘 가슴이 뛴다”고 말한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난 ‘별 성’에 ‘일곱 칠’, 김성칠이라고 하오”(앞집 여인 금님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박근형은 안방극장의 단골 배우 중 하나지만, 스크린 나들이는 뜸했다. 사실 충무로에 중견 배우를 위한 시나리오는 드물다. 그렇다보니 대다수 중견 배우들이 안방극장의 엄마나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에 만족한다. 그 점이 아쉬웠던 박근형에게 강제규 감독이 건넨 ‘장수상회’의 시나리오는 단비처럼 반가운 것이었다. 게다가 박근형의 입장에선 다시 없을 수 있는 로맨스 연기의 기회였다. 촬영을 앞둔 박근형은 신인 못지 않은 열의로 작품을 준비했다.

“젊었을 때 멜로 드라마에서 주인공 하던 시절로 돌아온 기분이었죠. 어느 한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나만 가진 특성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를 두고 고심했어요. 강제규 감독이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머리를 깎겠다고 나섰죠. 나이든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는데, 근사한 머리는 어색하잖아요. 또 연극학도처럼 한 씬 한 씬을 분리해서 어떤 감정으로 가고 있나, 목표는 어디인가 분석해가며 연습하기도 했어요.”

오랜만에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하려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는 괴팍한 성칠이 금님을 만나며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을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연기했다. 학창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에게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만 쥐어주고 도망쳤다고. 그는 “짝사랑이든 첫사랑이든 그 마음은 10~20대나 70대나 같다고 본다. 세대에 따라 표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그 열정은 나이와 상관없이 큰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수상회’는 노년의 사랑을 중심으로, 뭉클한 가족애도 담고 있다. 앞서 박근형도, 상대역 윤여정도 언론 시사회 당시 많은 눈물을 보였다. 박근형은 어떤 형태를 빌려서든 감동이 있어야 진정한 드라마라 할 수 있다고 소신을 밝혔다. 그러면서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경쟁사회다 보니, 자신의 처지를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아량이 없다. 우리 영화를 보고 가족들이 함께 울고 웃고 공감하다보면, 요즘 사람들의 인성에도 자극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 “데이트 아니라니까, 글쎄. 소문내지 마!”(금님과의 데이트를 앞둔 성칠의 쑥스러움 담긴 항변)=‘장수상회’에서 만날 수 있는 ‘로맨티스트’ 박근형의 모습은 사실 ‘꽃할배’에서 출발한 것이다. 10~20대에게 박근형은 드라마보다 예능 프로그램으로 더 친숙하다. 처음에 그는 ‘꽃할배’ 출연 여부를 두고 고심 끝에 제안을 고사하기도 했다. 배우의 신비감이 벗겨지면, 연기 생활에 타격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예능은 연예인의 감춰진 뒷부분을 캐내는 건데, 근엄한 이미지였던 내가 이걸 덜컥 해도 되나 싶었죠. 그래서 안 한다고 했더니 저희 소속사 대표가 꼭 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사실 처음엔 여행에 별로 흥미도 없었어요. 그냥 일행을 어슬렁어슬렁 따라다니며 사진 찍고 (아내에게) 전화하고 이러는 게 얘깃거리가 돼서 깜짝 놀랐죠. 다른 사람은 집에 전화도 안하나.(웃음)”

박근형은 ‘꽃할배’에서 부각된 로맨티스트 이미지에 대해선 과장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제가 갑자기 로맨티스트가 됐는데 우리 마누라는 거짓말이라고 한다”며 “그 사람은 나와 여행가는 걸 꿈으로 알고 있다. 내 입장이 이렇다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하면 서운해 한다. 지금까지 아내에게 해준 게 없으니까, 여행 가면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꽃할배’ 출연은 신의 한 수였다. 대중에 친숙하게 다가서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다. 본의 아니게 ‘회장님’ 역할을 많이 하다보니 엄격하고 냉철한 이미지가 강했는데, ‘꽃할배’ 이후 선량한 이미지가 자리잡았다. 그는 “예능 출연 전엔 중년 이상의 팬들만 알아보고 다가왔는데, 이제는 아무나 다 와서 말을 건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우리 잘못이 아니오. 세월 이기는 장사 있나”(금님에게 전하는 성칠의 따스한 위로)=우연치 않게 최근 중년·노년을 전면에 내세운 콘텐츠가 많이 등장했다. 지난해 말,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로 약 500만 관객을 울렸다. 배우 안성기가 주연을 맡은 영화 ‘화장’(감독 임권택)이 ‘장수상회’와 같은 날 개봉하고, 김혜자·장미희가 활약하는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이 수목극 1위를 꿰차며 사랑받고 있다. 반가운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국내 드라마나 영화는 소재가 여전히 제한적이죠. 외국에선 노년이나 장년들이 활동할 수 있는 콘텐츠가 훨씬 풍부해요. 우리가 ‘창조문화’를 얘기하지만 60~70대 배우 자원을 스스로 버리고 있잖아요. 드라마든 영화든 모든 세대가 어우러질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가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지금의 한류보다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중년·노년의 배우들이 설 무대가 좁은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건, 그의 연기 열정이 남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연기자로서 스스로 단련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작품과 역할의 성격에 따라 대본을 숙지하고 연기 연습을 하는 방법도 다 다르다. 과거 연극 무대에 오르던 시절, 한 캐릭터에 대한 연구만 8시간씩 하던 그 성실함이 여전히 남아있는 모양이다.

“한참 어린 친구들과 있어도 경쟁적으로 제 역할에 대해 구상해요.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는 건 언제든 열려 있어요. 아마 제가 필요 없어서 부르지 않을 때까지는 도전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현빈이 연기했던 다중인격 캐릭터도 배우 입장에서 설렐만 한 역할이었어요. 다른 부분에선 뒤처질 지 몰라도, 연기에서 만큼은 늘 가슴이 뛰어요.”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