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지 마시라, 섹시·당당함 차버린 그녀 김혜수

“나 이대 나온 여자야”(영화 ‘타짜’), “엣지 있게 행동해!”(드라마 ‘스타일’)

유행어는 곧 캐릭터다. 배우 김혜수(45)가 남긴 대사는 콧대 높은 여성 캐릭터를 떠올리게 한다. 청순했던 과거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팬들도 많지만, 2000년대 들어 김혜수는 건강하면서도 섹시한 매력이 두드러졌다. 다수의 작품에서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며 다른 여배우들이 흉내낼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해갔다. 심지어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선 영화상 후보나 수상 결과보다 진행자인 김혜수가 입은 드레스에 더 많은 시선이 쏠리기도 한다. 그렇게 김혜수는 여배우들은 물론, 일반 여성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배우 김혜수가 영화‘ 차이나타운’을 통해 범죄 조직의 보스 역할에 도전했다. 김혜수는 “나는 여전히 현장에서 느끼고 배우는 게 좋다”고 말한다. [사진 제공=CGV 아트하우스]

물론 김혜수는 ‘워너비’ 스타이기 이전에 배우였다. 새 영화 ‘차이나타운’(감독 한준희ㆍ제작 폴룩스픽쳐스)에서 그녀는 화려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범죄 조직의 보스로 나타났다. 인천 차이나타운 한 가운데 서있어도, 행인들이 김혜수인 줄 몰라볼 정도였다. 화려한 메이크업 대신 기미와 주근깨를 그려넣고, 몸매를 드러낸 드레스 대신 넉넉한 활동복을 입었다. 향긋한 와인 한 모금을 즐기기 보다, 독한 고량주를 입에 털어넣는다.

극의 정서와 캐릭터엔 일찌감치 매료됐지만, 김혜수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한동안 주저했다. 출연 결심이 선 뒤에야 그녀는 생각했다. “작품을 ‘한다’ 혹은 ‘안 한다’지 ‘해 본다’는 건 없지 않나. 일단 한다고 결정했으면 달려야 한다”고.

▶“차이나타운 거리서 아무도 몰라보더라”=사실 충무로에선 최근 여배우 중심의 작품을 구경하기 어렵다. 그나마 여배우들이 극을 이끄는 영화도 로맨스나 코미디, 드라마 장르에 한정된다. 그런 점에서 ‘차이나타운’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였다. 피 튀기는 액션 누아르의 중심엔 여성 두목(김혜수)이 있고, 이에 대적하는 인물 또한 여성(김고은)이다. 여성 캐릭터 사이에서 권력 다툼 및 승계가 이뤄진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김혜수가 연기한 ‘엄마’(본명 마우희)는 대출과 심부름센터 업무를 하는 ‘마가흥업’의 우두머리다. 채무자의 각막을 적출해 내다팔 만큼 비정한 인물이다. 거리에서 숨을 헐떡이는 개를 발견하고 때려 죽이는 건 엄마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차피 살아날 가망이 없다면 죽음을 돕는 것 또한 자비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지하철 보관함에 버려져 차이나타운에서 자란 일영(김고은 분)에게도 ‘살기 위해선 네가 쓸모 있다는 증명을 해보라’고 말한다.

다양한 캐릭터를 거쳤지만, 조직의 보스 역할은 김혜수도 처음이다. 게다가 스타일리시한 누아르 영화의 각 잡힌(?) 보스가 아닌, 차이나타운 거리 어디에서든 마주칠 것 같은 인물이라는 점이 독특했다. 김혜수는 “차이나타운에서 길을 물어보려고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는데 뒤돌아서는 사람이 마우희”인 그림을 머릿속에 그렸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괴물같은 기괴한 면이 있는 사람을 떠올렸죠. 체격은 있지만 건강한 몸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굉장히 손상되고 방치된 흔적이 담긴 몸이었으면 했어요. 애들을 앵벌이시켜 영양크림 바르는 사람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갈 뿐인 사람이죠.”

촬영 당시 김혜수가 온다는 소문에 인천 차이나타운이 들썩였다. 정작 김혜수가 나타났는 데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희끗하게 탈색한 머리에 거친 피부, 거기에 ‘가짜 뱃살’까지 붙였으니 알아보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었다. 김혜수는 행인들이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상황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극 중에선 ‘엄마’가 자극적인 설정이 많은 캐릭터지만, 실제 차이나타운에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인물이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사람들이 ‘이상한 여자가 있네’라며 쳐다보지 않았다는 건 성공한 거죠. 단순히 김혜수가 변신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 자신이 김혜수가 아닌 캐릭터 자체로 보이는 것이 중요했어요.”

▶“오래 연기했다고 엄청난 게 있을까? 글쎄…”=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한 김혜수는, 60여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해 왔다. 한 직종에 30년 가까이 몸 담았다는 사실은, 곱씹어보면 놀라운 일이다. 정작 김혜수 본인은 덤덤하다. 그저 “처음엔 생각 없이 (연기를) 시작했는데 사람이니까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부분은 있다. 생각들이 정리되는 부분도 있고, 아직도 답 없는 것도 있고 그렇다”고 웃어 넘긴다.

사실 김혜수는 젊은 배우들을 보며 오히려 자극을 받는다고 말한다. 우연히 캐스팅 돼 연예계에 입문하면서 배우로서의 자의식은 늦게 성장한 것 같다고. 상대적으로 어릴 때 스스로 연기자의 길을 선택하고 도전하는 젊은 배우들이 대단하게 보일 수 밖에. 이번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김고은에 대해서도 “일영이 극 전반의 모든 감정을 끌어가야 하는데 대범하고 섬세하게 풀어갔다”고 칭찬했다. 


베테랑 배우들을 만나면 연기 경력이 쌓여갈 수록 선배로서의 역할에 대한 무게감에 짓눌린다고 토로한다. 자신의 연기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게 아니라, 현장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후배들에겐 멘토 역할도 해야하니 말이다. 상대적으로 김혜수는 긴 연기 경력에 따라붙을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후배들 역시 “김혜수 선배님은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가 전혀 없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결국 각자 느끼는 게 중요한 거고, 누군가 얘기해주는 건 그저 타인의 얘기일 뿐이죠. 서로 경험치가 다를 뿐이지, 오래 연기했다고 엄청난 얘기가 나오는 건 아니예요. 전 아직도 현장에서 제가 느끼고 배우는 게 좋아요. 오히려 후배 배우들이 다른 각도에서 바라 본 이야기가 자극이 되기도 하죠.”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배우의 길을 걸어오며 터득한 깨달음 하나는 꺼내놨다. 들어보니 배우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은 아닌, 누구나 공감할 법한 삶의 지혜이기도 했다. “내가 (작품이나 무대의) 중심이 되려고 하면 늘 부족함을 느끼지만, 좋은 것을 찾으려고 하면 그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는 꽤 많이 열려있더라”는 것이다.

▶“연기자 vs 자연인 구분, 무의미 해”=김혜수가 후배들에게 지적이나 조언을 삼가는 이유는, 본인 스스로가 부딪히고 깨지면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인 지 모른다. 사실 김혜수는 연기자가 천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연예계에 발을 들인 뒤, ‘이 일이 적성에 맞는지’, ‘최선의 선택인지’ 늘 고민해 왔다. 30대 초반까지도 ‘지금이라도 내 시간을 다르게 운영할 수 있다면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어릴 땐 뭐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은 지….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뒤늦게 더 강렬하게 자의식이 성장한 것 같아요. 그래서 본질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개입하지 못 하죠.”

김혜수는 여전히 대중의 관심 속에 사는 삶이 편하진 않지만 익숙해졌다고 말한다. 그녀는 “어릴 때는 내가 하는 일, 자연인 나를 구분하려고 애썼다면 어느 순간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며 “어차피 이 일을 하는 것도 나고, 이 일을 하며 성장하는 것도 나다.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연기자 김혜수와 자연인 김혜수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것 같더라”고 설명했다.

배우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김혜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여느 가정의 흔한 풍경을 줄줄이 늘어놨다.

“아마 평범했을 것 같아요. 결혼해서 애 셋 쯤 있지 않았을까. 그저 육아에 전념하는 후덕하고 따뜻한 아줌마? 아이들 맛있는 음식 해먹이고, 남편 양말 챙기면서 행복해 하기도 하고…. 아마 사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강도는 지금보다 훨씬 컸겠죠.”

대중의 관심을 크게 받는 스타일 수록, 나이를 먹어가는 일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김혜수는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없다고 말했다. 다만 “무한도전 ‘토토가’를 친구들과 봤는데 관객 정서에 공감하면서 나이를 체감했다”며 “나이 들고 있는 게 씁쓸할 때도 있고 토닥거려주고 싶을 때도 있다”고 웃어 보였다. 오히려 나이를 먹으며 좋은 점을 하나씩 깨달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어떤 가치가 우선인 줄 안다는 게 좋은 점이죠. 그리고 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중심이 생겼다는 것도? 또 과거에 피가 끓을 땐 지금보다 훨씬 직설적이고 공격적이었어요. 이제는 같은 의도라도 좀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됐죠.”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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