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의 서원을 가다] 예술과 애국혼 불태운 정읍 무성서원

1906년 최익현 선생의 항일의병 결성 강연도 이곳서 첫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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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의 정문 현가루<사진=이명애>

‘정읍’ 하면 ‘내장산 단풍’만 떠오른다면 올 가을 여행엔 이곳 무성서원에도 한번 발길을 돌려볼 일이다. 지난해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후 한국의 서원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서원이 발원됐다는 안동 지역의 세 곳을(소수, 도산, 병산 서원) 거쳐 전라도로 넘어왔다.

정읍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25년 전 서울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정읍에 내려 고창을 간 적이 있었다. 마중 나온 친구의 차를 타고 고창으로 넘어가는 길은 줄곧 산 등선을 따라 가는 도로였다.

이때 깊은 밤인데도 유별나게 환했다. 옆을 보니 환한 달님이 빛을 밝히며 열심히 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갑자기 그 달을 보자 학창 시절에 배웠던 백제 가요 정읍사가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달하 노피곰 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를 드 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졈그 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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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은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신분 차별없이 수학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 특징이다.<사진=이명애>

얼마나 정읍의 달이 밝던지… . 그때 우리 차를 따라 달리던 달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정읍은 내게 이렇게 환한 빛을 밝히는 달의 고장으로 기억됐다. 헌데 정읍에 위치한 무성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 됐단다.서원 취재를 핑계로 정읍을 방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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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을 중심으로 마을 한편에 연못이 자리하고 있어 연꽃을 즐기며 산책하기에 그만이다.<사진=이명애>

무성서원이 위치한 곳은 앞으로는 천이 흐르고 뒤로는 성황산을 등진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이다. 원촌마을 한 가운데에 무성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안동의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병산서원이 마을과 뚝 떨어져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이곳 무성서원은 외양상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마을 한 가운데에 언제든 마을 주민들이 방문해서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만큼 친근하고 격의 없어 보였다. 서원을 알리는 홍살문도 마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원촌마을이 곧 무성서원이고 무성서원이 곧 마을인 듯 싶었다.

이런 마음을 읽었던 걸까? 해설가가 “무성서원의 특징은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특수한 일부 사람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신분 차별없이 수학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 특징”이라며 해설을 이어갔다. 또한 이곳은 항일 의병운동의 첫 시작지였단다.

이곳 원촌마을에는 2원 5사라고 하여 서원 두 곳과 서당 5곳이 있는데 2원5사(무성서원, 용계서원, 남천사, 송산사, 필양사, 시산사, 도봉사)에서는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의 강탈에 맞서 저항한 항일의병운동이 이곳 서원을 중심으로 처음 일어났다고 한다.

항일 의병의 선봉장으로 알고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무성서원에서 1906년 첫 의병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실시했다는 해설가의 설명에 새삼 이곳 원촌 마을의 역사적 유산이 위대해 보였다. 무성서원에서 항일 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 선생은 결국 일본군에 의해 체포돼 대마도에 감금된 후, 단식 투쟁 끝에 1907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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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강수재 <사진=이명애>

무성서원이 기리고 있는 인물 중 대표적인 이가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해 천재로 이름을 떨치던 신라 시대의 학자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만인 18세에 빈공과(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하고 학자와 정치가로 이름을 떨치다가 고향이 그리워 신라로 돌아온다. 하지만 통일 신라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결국엔 태산(현 정읍) 지역의 향리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 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만 한 채 이곳 정읍에서 학문에 심취하고 태산의 관리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최치원.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견고한 신분제 사회를 구축한 신라의 권력층들은 그의 능력을 시샘하며 지방으로 떠돌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무성서원은 조선 시가 문학의 대표인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도 기리고 있다. 정극인은 최치원 등과 함께 무성서원의 사당인 태산사에 위패가 있고 무성서원 멀지 않은 곳에 정극인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전라도 지역을 예술의 고장이라 부른다. 단순히 근현대사의 예술가들만 배출한 곳은 아닌 것같다. 면면한 역사의 흐름에 문학과 예술의 고장이라는 말답게 걸출한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것이다. 역시 남다르다.

마을 한켠에는 큰 연못이 있어 연꽃이 한창이다. 안동 지역의 서원들이 연못을 만들어 서생들의 휴식 공간으로 삼았다면 이곳 무성서원이 위치한 원촌마을은 마을 주민 전체의 휴식 공간으로 연못이 위치해 연꽃을 즐기며 이곳저곳을 산책할 수 있는 풍경이다.

한국의 서원을 엘리트 교육의 산실이라고만 할 수 없는 마을 교육의 현장이 바로 무성서원이었다.

정읍=이명애 / 서울지사장

무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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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명애>

신라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사적 166호).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백성이 살아있을 때부터 제를 올렸던 생사당(生祠堂), 태산사가 뿌리다. 이후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영천 신 잠의 생사당이 태산사와 합해졌고 태산서원으로 불리다가, 1696년(숙종 22)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됐다.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시초인 [상춘곡]의 작가인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등을 추가로 배향하며 성장했고,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으며 역사적·학문적 가치를 증명했다.

무성서원의 입구는 현가루(絃歌樓)로 불리는 두리기둥을 쓴 정면 3칸, 측면 2칸 기와집이며 안으로 들어가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으며, 오른쪽에 4칸의 강수재(講修齋), 왼쪽에 3칸의 흥학재(興學齋)가 있어 동·서재(東西齋)를 이룬다. 3칸인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우(祠宇)인 단층 3칸의 태산사가 있는데, 그 안에 최치원을 북쪽 벽에, 같이 모신 사람들의 위패(位牌)는 좌우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 중수한 것이며, 명륜당은 1825년(순조 25)에 불탄 것을 1828년에 중건하였다. 특히 이곳 무성서원에는 중요한 서원 연구자료가 있다. 1968년 12월 19일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여행 이야기, 한국관광공사·두산백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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