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베 리더십’ 결국 못찾은 일본 정국혼란…차기총리 후보 앞에 놓인 과제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7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시바는 총리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EPA]

[헤럴드경제=김지헌 기자] 지난해 10월 취임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불과 1년만에 자민당 총재직과 일본 총리직을 동시에 사임하기로 했다. 국회 양원에서 모두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며 자민당에 충격적인 선거 패배를 안기고 고물가 대응 실패 등과 당내 분열 심화 속에서 측근들의 퇴진 압박을 이기지 못한 이시바 총리가 결국 백기를 들고만 모습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강력한 보수 리더십’을 대체할 ‘포스트 아베 리더십’을 여전히 찾지 못한, 혼란스런 일본 정국의 오늘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시바 총리는 이달 초만 해도 정권 유지에 의지를 드러냈으나 당내 4역이 일제히 사의를 표명하고 160여 명이 조기 선거에 찬성하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사의를 결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바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관세협상을 마무리한 지금이 적절한 퇴진 시기”라며 “차기 총리에 길을 양보하는 결정을 했다. 차기 총리가 정해질 때까지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사임 의사 표명에 따라 자민당은 8일 마감 예정이던 조기 총재 선거 찬반을 묻는 절차 대신 총재 선거 체제로 들어갔다.

日 자민당 후보 누가 나오나?…“다카이치 전 경제안보담당상과 고이즈미 농림수산상 주목”

일본 주요 언론은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가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과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중심으로 치러질 것으로 전망했다. 여기에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모테기 도시미쓰 전 자민당 간사장까지를 주요 후보로 보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자민당이 ‘보수 회귀’와 ‘야당과 협조’ 중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새 총재가 결정될 것이라고 해설했다. 당내 온건파였던 이시바 총리 체제에서 우익 야당 참정당 등으로 이탈했던 보수 지지층을 되찾아야 한다고 판단하면 보수 회귀 노선을, 소수 여당 체제에서 안정적 국정 운영을 우선시한다면 야당과 협조 노선을 택해야 한다.

만일 자민당이 ‘여자 아베’로 불릴 만큼 보수색을 전면에 내세운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담당상을 새 총재로 선출하면 보수색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마이니치신문은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담당상에 대한 당내 보수층 지지가 ‘양날의 검’이라면서 옛 아베파가 ‘비자금 스캔들’ 문제에서 아직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어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등 일부 야당은 자민당의 보수색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고, 연립 여당인 공명당도 보수 중도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AP]

반면 자민당 의원과 당원들이 야당과 협조하는 쪽으로 기운다면 제2야당 일본유신회와 관계가 원만하고 개혁 이미지가 있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이 새 총재로 뽑힐 가능성이 크다. 작년 총재 선거에서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을 지지했던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도 일본유신회 측과 깊이 교류해 온 터라 여당이 추진하는 법안, 예산안을 원활히 통과시킬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마이니치는 당원 인기 측면에서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담당상이 고이즈미 농림수산상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해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당원·당우로부터 109표를 얻어 1위에 올랐으나,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61표를 획득해 3위에 그쳤다.

요미우리신문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 초점은 여소야대 구도 속 자민당·공명당 정권 유지 여부와 중의원 해산 여부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새 자민당 총재 임기는 이시바 총리의 총재 잔여 임기인 2027년 9월까지다. 신임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하지 않을 경우 이때까지 예정된 중의원·참의원 선거는 없다.

총재가 되어도 해결할 일 ‘산적’

이시바 총리 이후 신임 총재는 산적한 과제를 떠안게 된다. 우선 자민당이 일본 국회의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서 날로 불안정서이 높아지고 있는 ‘정국 혼란’ 이슈다. 이 문제는 중의원(하원)과 참의원(하원) 모두 여소야대로 정치 지형이 바뀌었다는 데서 시작한다.

신임 총재 선출 뒤가 더 암울하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장 신임 자민당 총재가 국회에서 신임 총리로 지명될 보장조차 없다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내각책임제인 일본에서는 중의원에서 과반 투표로 지명 선출된 총리가 내각을 구성하므로, 산술적으로는 현 야당이 결집해 총리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면 정권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지난 4일 도쿄 국회 중의원에서 열린 임시국회 예산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자민당의 신임 총재가 다시 총리를 맡게 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내각 불신임 결의안 제출 등으로 다시 정국이 소용돌이칠 가능성이 있다. 자민당 내 온건파로 통하는 이시바 총리의 경우 정책별로 야당에 양보하고 협조하면서 외줄 타기하듯 정국을 운영해왔지만, 신임 총리의 성향에 따라서는 여야가 충돌해 내각 불신임이 이뤄지면서 다시 총선이 치러질 수도 있다.

신임 총재는 자민당 내 ‘집안 싸움’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아베파, 아소파 등 주요 자민당 파벌이 연이어 비자금 스캔들·정치자금 문제에 연루되며 선거에서 패배했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 각 파벌이 총리직 리콜과 내부 권력투쟁에 집중하며 더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평가다.

2023년말부터 수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문제는 일본 정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이슈다. 자민당 파벌 중 일부가 정치자금 모금 행사에서 ‘파티권’을 할당량 이상 판 소속 의원들에게 초과분 돈을 다시 넘겨주는 방식 등으로 오랫동안 비자금을 조성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이 스캔들로 일부 의원은 징계를 받았고, 자민당 파벌은 대부분 해체했다. 도쿄도 의회의 자민당 회파도 당 중앙 파벌과 마찬가지로 과거 정치자금 모금 행사(파티)를 주최하면서 수입 일부를 정치자금 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 경제 회복 정책 등 이시바 정부가 추진해온 과제들을 차질 없이 수행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미국과는 자동차·반도체·농산물 관세를 15%로 조정하는 합의가 있었으나, 여전히 시장 불안과 기업들의 불만이 남아 있다.

고물가 대책 등 경제 회복 정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물가 상승에 대한 소비자들의 경계감이 강해지면서 일본 내수 소비가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최근 몇 년간 일본의 고물가 현상은 원재료·식료품 가격 급등, 에너지 가격 불안, 엔화 약세, 유통비용 상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6월 17일 (현지시간)캐나다 앨버타주 카나나스키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계기 양자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AP]

한일 관계는 자칫 하면 후퇴될 위기에 처했다. 신임 총재 후보자 모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등 한일 관계에 찬물을 끼얹은 대외 행보를 보일 수 있다는 평가다.

앞서 이시바 총리는 보수 정당인 집권 자민당 내에서 역사 인식이 비교적 온건한 ‘비둘기파’로 평가됐고, 국회 연설 등에서 한국에 대해 “국제사회의 여러 과제에서 파트너로서 협력해야 할 중요한 이웃 나라”라며 한일관계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 6월 이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대면 회담과 전화 통화 등을 통해 한국과 긴밀히 협력하며 양국 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는 주일 한국대사관이 6월 주최한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리셉션에도 참석해 “한일 협력의 저변을 넓히면서 그동안 만들어 온 교류의 장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시바 총리는 전후 80년을 맞아 개인 명의 메시지를 내는 방안도 추진했지만, 당내 보수파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밀려 사임하는 형국이라 메시지 발표도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교도통신은 “이재명 대통령이 8월 일본을 방문해 이시바 총리와 회담하고 한일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협력을 막 확인한 참이었다”며 “한국에서 이시바 총리는 역사 문제 등에서 비교적 온건하다고 알려져 퇴진 후 한일관계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올 듯하다”고 해설했다.

그러나 유력한 차기 자민당 총재 후보인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모두 패전일이었던 지난달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전력이 있다. 특히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한국과 갈등을 빚었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정치 노선을 따르고 있고, 작년 총재 선거 당시 향후 총리가 돼도 야스쿠니신사를 계속해서 참배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어 그가 집권하면 한일관계가 악화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관측된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