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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근성 높은 연극 ‘해리엇’의 연출가 김지원(왼쪽부터), 배우 홍준기, 수어 통역 배우 정은혜 [강동아트센터 제공] |
바다 가까운 곳에 자리한 어느 동물원. 갈라파고스 거북 해리엇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다. 오래 살아 더 느려지고, 오래 살아온 세월의 길이만큼 몸집이 커져 버렸다. 175년의 긴 세월 동안 마음 깊은 곳에 바다를 품고 살아온 그의 곁에 어리고 외로운 자바 원숭이가 선다. “넌 혼자가 아니야, 찰리.” 연극 ‘해리엇’의 한 장면이다.
무대에서는 하나의 역할마다 두 명의 배우가 섰다. 해리엇도 두 명, 찰리도 두 명. 공연계 필수인 ‘더블 캐스팅’이 아니다. 거북 해리엇과 원숭이 찰리를 연기하는 배우들과 함께 이들과 똑같이 수어로 연기하는 ‘그림자 소리’ 배우들이 한 자리에 선다. 이런 이유로 ‘해리엇’의 앞에는 ‘접근성 연극’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누구나,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연극이라는 것이다.
연습 중이었던 서울 강동구 강동아트센터에서 최근 만난 연출가 김지원은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보고 들을 수 있는 연극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연극이지만, 배우들에겐 난관이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을 연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수어로 연기하는 배우가 무대에 동시에 서다니…
덕분에 두 배우에게 주어진 당면 과제는 동일한 움직임과 판박이 연기였다. 또 ‘해리엇’ 세계관의 표현 방식도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얼만큼 동물성을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배우들과 무수한 대화를 통해 원숭이의 민첩함과 동물원에 잡혀 온 찰리의 불안을 표현하는 정도로 적정선을 삼았다.
찰리로 분한 배우 홍준기는 “흉내 내기에 그치는 것은 지양했다”며 “사람이 있을 때에는 원숭이로 보이되, 사람이 없을 때에는 동물로 보이려 하지 말자고 규칙을 정했다”고 했다. 수어 연기를 맡은 배우 정은혜는 홍준기의 몸짓을 따라갔다.
무용 전공자답게 긴장감 등 몸의 텐션을 무대에 설치된 구조물(동물 우리)에 맞춰 움직이며 드러내고, 감정 표현 방법을 고민했다. 김지원은 “이 둘만 보면 음성 언어도 들리고 수어도 보인다”며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합이 척척 맞는다”며 감탄했다.
‘해리엇’은 갈라파고스 거북 해리엇과 어린 자바 원숭이 찰리의 따뜻한 동행을 그린 연극으로, 한윤섭 작가의 동명 동화를 무대로 옮겼다. 홍준기는 “단단한 내면을 가진 애어른 같은 자바원숭이 찰리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을 투영해 연기했다”고 귀띔했다.
‘각색의 핵심’은 주인공들의 관계성을 통한 서사의 강화였다. 원작과 달리 무대에서는 해리엇과 찰리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이고, 해리엇의 내면 목소리를 꺼내와 음성 해설(내레이션)로 들려준다. 특히 접근성 요소를 살리기 위해 원작을 재구성하기도 했다. ‘음성 해설’과 ‘대사’의 언어로 대본을 정리하고, 이를 수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쳤다.
“수어와 음성언어는 어순이 다르고, 음성언어엔 있지만 수어엔 없는 표현이 많아요. 예를 들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어?’라는 질문은 수어로 할 수 없어요. ‘호랑이도 태어날래, 사자로 태어날래’ 식으로 구체적으로 물어야 해요.”(김지원·정은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해리엇과 찰리의 동행은 ‘접근성 높은 공연’이라는 설명을 빼도 공연 언어로 온전히 존재할 따뜻한 작품이었다. 12일부터 단 이틀간 강동아트센터에서 열린 공연은 티켓 판매 사이트가 열리자마자 금세 매진됐다. 김지원은 “아이들에겐 직관적 언어로 재미를 주고, 어른들에게 깊은 울림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지원은 “어느 순간 배리어 프리라는 말이 생겼지만, 모든 장벽을 없앨 수는 없다”며 “그럼에도 접근성 공연은 접근성을 넘어 한 사회가 가져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처럼 자기 삶에서 작게나마 인식의 변화가 오는 것, 그 모든 과정이 소중하다”고 말했다.
홍준기도 “다른 공연들과 달리 수어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모두가 멈춰야 하는 순간들이 있어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라면서도 “모두의 이야기를 하나로 담아 객석까지 닿도록 에너지를 쓰는 이 작업이 내겐 우주 같다”고 했다. 고승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