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한령(限韓令)’ 피해 세계로…‘K-뷰티’ 중견기업만 날았다

中의존 축소…美·日·유럽 등 시장 전환
에이피알 영업익 200% 증가 ‘모범사례’
한국콜마 등 ODM도 인디 브랜드 안착
아모레·LG생건, 회복 속도 답보 대조적


에이피알의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 옥외광고. [에이피알 제공]


2017년 미국의 한반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이후 ‘한한령(限韓令)’으로 일컬어지는 중국의 비공식 보복은 한국 화장품 산업의 성장 공식을 근본부터 흔들었다. ‘사드 보복’은 단기간 매출 감소에 그치지 않고, ‘중국 중심 구조’라는 산업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문제는 사드 이후의 대응이었다. 대형사들은 중국 시장 회복과 브랜드 리빌딩에 방점을 찍었지만, 전략 전환의 속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방향성은 분명했으나, 매출 구조와 유통 채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실적 회복은 지연됐고, 주가는 장기간 바닥권에 머물렀다.

반면 같은 시간을 보낸 중견·중소 화장품사들의 선택은 달랐다. 중국을 ‘되찾아야 할 시장’이 아니라 ‘분산해야 할 시장’으로 규정했고, 미국·일본·동남아·유럽을 동시에 겨냥하는 다변화 전략으로 빠르게 선회했다. 그 결과는 최근 실적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에이피알, 사드 이후 전략 전환의 결과표=10일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에이피알은 2025년 연결 기준 매출 1조5273억원, 영업이익 3654억원을 기록했다고 4일 공시했다. 영업이익률은 23.9%나 됐다. 전년 대비 매출은 111.3%, 영업이익은 197.8% 증가한 수준이다. 당기순이익은 2904억원으로 전년 대비 169.9% 증가했다. 매출 성장과 함께 수익성이 동시에 개선된 ‘질적 성장’이 나타났다는 평가다. 에이피알의 지난해 4분기 매출액은 5476억원, 영업이익은 1301억원을 기록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해외 매출이다. 상상인증권에 따르면 에이피알의 2025년 해외 매출 비중은 87%로 지난 2024년 대비 29%포인트 확대됐다. 주력 국가인 미국의 매출은 1년 전 대비 270%가 늘었고, 일본은 289%가 폭발 성장했다. 중화권(11%)과 유럽 포함 기타지역(192%)의 매출도 대폭 확대됐다. 상상인증권 김혜미 연구원은 이를 두고 “상상을 초월하는 실적”이라고 평가했다. 이같은 회사의 폭발적 실적은 단순한 일회성 호실적이 아니라, 사드 이후 구축해 온 사업구조 덕분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에이피알은 메디큐브 등 자체 브랜드를 앞세워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과 일본을 핵심 성장 축으로 설정했다. 특히 틱톡·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과거 대형 브랜드만 가능했던 해외 마케팅의 문턱을 크게 낮췄다. 현지 오프라인 행사와 대형 유통망에 의존하지 않고도, 온라인 콘텐츠만으로 현지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증권가에서는 “사드 이후 K-뷰티 전략 전환의 교과서적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ODM회사들도 발빠른 대처=이 같은 전환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ODM 기업들의 역할 변화도 있다. 한국콜마와 코스맥스는 사드 이후 대형 고객사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글로벌 인디 브랜드와 중견 브랜드 비중을 빠르게 늘렸다.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사드 이후 대형사와 중소 고객사의 대응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고, 그 차이가 지금 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인디 브랜드들은 해외 시장 공략 속도가 빠르고, ODM 입장에서도 성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선케어, 앰플, 크림 등 글로벌 수요가 높은 카테고리에서 중견 브랜드들의 발주가 크게 늘었다.

여기에 ‘실리콘투’와 같은 K-뷰티 전문 유통·마케팅 기업이 가세하며 생태계는 더욱 단단해졌다. 실리콘투는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K뷰티 브랜드의 현지 진출을 돕고 있으며, 동남아와 유럽으로 시장을 확장하고 있다. 과거처럼 ‘현지 법인 설립→오프라인 유통’이 필수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에이피알을 비롯해 마녀공장, 구다이글로벌(조선미녀·티르티르),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한국콜마·코스맥스까지 이들은 중국 리스크를 계기로 시장을 분산했고, 글로벌 마케팅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구다이글로벌은 다양한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어 기존 뷰티 기업과 차별화 된다. 또 달바글로벌의 성장세도 매섭다. 키움증권은 달바글로벌 4분기 매출액이 1451억원, 영업이익은 273억원에 이를 것이라 내다봤다. 이는 전년 대비 각각 52%, 103% 성장한 규모다.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미국 시장은 아마존이 온라인 시장은 틱톡과 인스타그램이 바이럴 마케팅의 최적 유통채널로 부상했다. 중견 중소 화장품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채널이 대폭 늘어났다”며 “기존 대형 채널을 보유한 화장품 대기업 입장에선 바뀐 환경에 적응이 쉽지 않았고 시간도 지체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형사들, 사드 대응 늦어… 실적 개선은 가시권=아모레퍼시픽의 지난해 실적 전망치는 매출 약 4조2770억 원, 영업이익 3440억원 안팎이다. 아모레퍼시픽은 3년 만에 4조원대 매출 복귀가 기대되고 있다. 다만 지난해 4분기 실적은 희망퇴직을 받는 등 일회성 비용이 늘어난 탓에 기대만큼 높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아모레퍼시픽의 지난해 4분기 매출액은 1조1237억원, 영업이익은 677억원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93% 증가한 수준이다. 영업이익은 13.67% 감소한 수치다. SK증권은 “희망퇴직 관련 일회성비용 410억원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분석했다.

LG생활건강은 2025년 4분기 연결 매출 1조4728억원(전년 대비 -8.5%)에 영업손실 727억원으로 적자 전환했고, 연간으로도 매출 6조3555억원(-6.7%), 영업이익 1707억원(-62.8%)까지 밀렸다. 회사가 밝힌 배경은 유통채널 재정비 장기화와 희망퇴직 등 인력 효율화에 따른 일회성 비용 부담이다. 즉, 중국 변수 이후 ‘체질 개선’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비용이 먼저 반영되면서 실적은 되레 꺾이는 모양새다.

중견 화장품사들과 대형 화장품사들의 실적 희비가 갈리는 것은 ‘사드 보복’ 이후 대응 방향에 따라 갈렸다는 분석이다. 대형사들은 중국 오프라인 유통망과 면세점 중심 구조를 빠르게 해체하기보다 정상화를 기다렸고, 미국·일본 등 글로벌 시장 공략 역시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화장품업계 관계자는 “조직 규모가 큰 만큼 의사결정 속도는 느렸고, 사드 후속 대응은 신규 성장보다 비용 효율화와 구조조정이 먼저 실적에 반영됐다. 글로벌 마케팅 환경이 틱톡·인플루언서 중심으로 급변하는 동안, 대형사들의 대응은 결과적으로 한 박자 늦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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