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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 2차 세계대전 포성 속에 ‘유엔(United Nations)’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미국·영국·소련·중국을 포함한 26개국은 연합국으로서 “끝까지 공동으로 싸우며 적국과 단독 강화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서명했다. 전쟁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이 약속은 1945년 4월 50개국 대표들이 모여 유엔 헌장을 작성하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10월 24일 유엔은 공식 출범했다.
그로부터 80년 후 2025년 9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 구상을 처음 공개했다. 평화위원회는 가자 재건을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세계 다른 분쟁 해결에도 참여하는 국제적 역할을 목표로 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대체하겠다는 선언의 다름 아닌 것이다.
유엔이 기능 부전에 빠진 사이 등장한 평화위원회는 지난 1월 22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본격 출범했다. 그러나 평화위원회는 ‘세계 평화’를 말하면서도 기존 국제질서를 흔들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권력의 과도한 집중이다. 초대 의장인 트럼프 대통령은 사실상 모든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의장 임기에도 제한이 없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종신 의장으로 남을 수 있는 구조다. 회원국의 임기는 3년에 불과하고, 상임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10억달러(약 1조4700억원)를 부담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 퇴임 이후 개인적 사업조직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회원국은 중동 국가를 중심으로 20여 개국에 그친다. 국제기구라기보다, 특정 인물이 주도하는 사교 클럽에 가깝다. ‘트럼프에 의한, 트럼프를 위한 또 하나의 골프클럽’이라는 지적도 이 때문이다.
유엔과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유엔은 회원국 신청 이후 엄격한 심사를 거쳐 가입이 결정된다. 사무총장 임기는 5년이며 두 차례까지만 연임이 가능하다. 총회는 ‘1국 1표’ 원칙에 따라 운영되고, 안보리에서는 미국·중국·러시아·영국·프랑스 등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가진다. 재정 역시 각국 분담금으로 충당되며 회원국 수는 현재 약 190개국에 이른다.
물론 유엔은 그동안 한계를 드러내 왔다. 중동·아프리카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무력감,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남용, 특히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사회에 깊은 좌절을 안겼다.
그러나 유엔의 대안이 다자주의 개혁이 아니라 또 다른 일극 권력의 등장이라면, 이는 문제 해결이 아닌 위험의 이전일 뿐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평화위원회가 국제정치의 예측 불가능성을 키운다는 사실이다.
G7, G20, 유엔과 같은 기존 다자 틀과 연계되지 않은 채, 밀실에서 강대국과 자금력을 갖춘 국가들이 세계의 향방을 논의한다면 국제질서는 더욱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중소국과 약소국의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고, 힘과 거래가 정의를 대신하게 될 우려도 커진다.
한국은 일본, 러시아, 인도 등과 함께 평화위원회 가입을 유보한 상태다. 앞으로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럽 대부분 나라는 불참하기로 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이후 관세, 동맹, 안보를 가리지 않고 전후 국제질서를 흔들고 있다. 유엔의 기능 부전은 개혁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다. 규범과 절차가 아닌 개인의 의중이 세계 평화를 좌우하는 시스템은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나의 도덕성만이 나를 멈출 수 있다”는 한 개인에 세계 평화를 맡길 순 없다.
천예선 국제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