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평소 즐기지는 못하지만 늘 바라는 한 가지를 꼽자면 여행이다. 국내든 해외든 늘 여행을 꿈꾼다. TV로도 여행프로그램을 가장 자주 본다. 일년에 한 두번씩은 가족과 함께 떠나려고 하지만 불규칙한 촬영 일정 때문에 못 이루는 경우가 많다. 최근엔 모처럼 짬을 내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모처럼 보름간의 가족 여행이었다.
실제 여행길은 마음처럼 자주 오를 수 없었지만, 장르와 스토리, 인물을 종단, 횡단하는 스크린의 여행은 마음껏 다녔다. 지난 1996년 영화에 데뷔한 이래 출연작만 30편이 훌쩍 넘어간다. 특별히 최근 1~2년간은 시간의 여행자였고, 장르의 여행자가 됐다. 지난해 개봉했던 ‘열한시’에선 ‘타임 슬립’(시간 이동)을 겪어 24시간 후의 미래로 떠난 과학자였고, 오는 10일 개봉하는 ‘방황하는 칼날’에선 딸을 잃은 비련의 아버지로 ‘비극의 현재’를 살게 되며, 30일 개봉하는 사극 ‘역린’에선 조선 정조시대의 내시가 된다. ‘방황하는 칼날’과 ‘내가 살인범이다’(2013년)가 범죄스릴러였고, 올초 개봉했던 ‘플랜맨’은 로맨틱 코미디였으니 SF(‘열한시’)와 사극(‘역린’)까지 장르 횡단의 폭도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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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UND studio] |
“예전보다 더 몰아찍거나, 더 많이 출연한 것은 아니죠. 몇 개월 찍고 좀 쉬었다 다시 촬영하는 리듬은 유지했지만 공교롭게 개봉 시기가 몰려서 다작한 것처럼 보인 거죠. 장르는 바꿔가며 촬영하니까 색다른 재미는 있어요. 말하자면 여자나 남자나 외모, 취향, 직업, 성격 모두 다른 상대를 늘 바꿔가며 만나는 느낌? (흐흐) 물론, 좋은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기억에 남는 영화를 하는 게 중요하죠.”
정재영을 최근 서울 신문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누구라도 소주 한 잔 기울이고싶어할만한 소탈한 웃음과 뻐기는 법 없이 격의없는 대꾸가 여전했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시나리오가 매력적이었지만, 쉽지는 않은 작품이었다. 일본의 유명한 스릴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아내와 사별하고 애틋하게 키워온 여고생 딸이 어느날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같은 또래 남학생 몇 명에게 유린당한 채 죽은 것이다. 경찰 수사 중 형사보다 한발 앞서 가해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아버지는 공범 중 한 명을 찾아갔다가 우발적으로 소년을 죽인다. 피해자, 희생자의 유족에서 ‘살인자’가 된 남자. 그는 또 다른 가해자 소년의 행적을 찾아 나서고, 경찰은 또 다른 범행을 막기 위해 남자를 추적한다. 유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큼 시나리오는 매력적이었고 완성도가 높았지만, 딸을 잃은 아버지가 살인자가 돼 쫓기는 심리연기와 추운 겨울 숲속을 헤매는 장면은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얘(주인공이 뒤쫓는 가해자 소년)는 왜 한겨울에 산으로 도망가서 힘들게 해? 괌같은 곳으로 가지 말야”라고 스탭들과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찰과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가해자 소년을 대면하는 장면은 연극 포함해 20여년 이상 연기만을 해온 배우에게도 힘든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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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UND studio] |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니 집중도 안 되고, 감정이 이해는 되지만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하기가 싫다고 생각이 들정도로 어려운 장면이었죠. 영화를 찍으면서 이 정도로 애를 먹은 경우는 몇 번 없었던 것 같아요. 작품 촬영 처음부터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됐으니까요. 싸움도 한번 안 해봤을 것 같은 남자가 딸이 유린되고 죽어가는 동영상을 보고 가해자 소년을 몽둥이로 살해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그 마음을 갖고 계속 영화가 진행이 돼야 하니까 말이죠.”
바로 전작은 ‘플랜맨’이었다. 로맨스 영화다. 뭐든지 정리 정돈 돼 있어야 하고, 계획대로 해야만 하는 결벽증과 강박증을 갖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정재영의 몫이었다. 그러고 보면 정재영은 그 또래의 남자배우들로서는 흔치 않게, 잊을만하면 로맨스 영화를 찍었다. ‘아는 여자’ ‘나의 결혼원정기’ ‘김씨표류기’ 등이 있다.
“로맨스도 어려가지가 있죠. 제가 하는 로맨스는 평범하거나 하자가 있는 인물의 것이죠. 저도 카사노바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관객들이 원할까요? (류)승룡이의 카사노바(‘내 아내의 모든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제가 하는 로맨스는 평범하거나 소심하거나 하자투성이인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영화들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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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UND studio] |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서른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니 정재영은 주연이든 조연이든 범죄의 세계든 인간적인 희극이든 모자란 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이든 서른 몇 개의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정재영은 자신이 연기한 작품 속 주인공들이 다 “마음 속 친구”로 남는다고 했다.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내가 연기한 분신이 또 하나 늘었다는 성취감이 먼저 들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주인공들이 모두 친구가 되는 느낌이에요. 좋은 놈, 나쁜 놈, 불쌍한 놈 모두 말이죠. 언제나 가장 최근에 사귄 친구, 이번에는 말하자면 ‘방황하는 칼날’의 이상현이 가장 마음에 쓰이지만, 지나고 나면 불쌍한 친구도 있고, 그냥 내버려둬도 잘 살고 있을 것 같은 친구도 있어요. 예를 들자면 ‘플랜맨’ ‘결혼원정기’ ‘김씨표류기’ ‘아는 여자’의 주인공들…. 이들은 저 정재영보다 모자란 친구들이고, 연민이 가는 친구들이죠. 반면에 ‘이끼’의 이장, ‘공공의 적’ 깡패, ‘실미도’의 부대원, 뭐 이런 친구들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