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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레스트 트레이딩은 세계적인 가방 브랜드 ‘에베레스트’를 제조 유통하고 있다. 23년 동안 에베레스트의 브랜드 가치를 신용에 두었다는 박병철 사장이 LA다운타운 인근 산타페 애비뉴에 있는 물류센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류종상기자
ⓒ2006 Koreaherald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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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가방브랜드 ‘에베레스트’를 키워낸 박병철사장은 고달팠던 시절의 물건들 몇가지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의 다운타운 산타페거리의 회사 집무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너덜너덜해진 밀짚모자가 그렇고, 이민올 때 경유한 일본에서 한 친척이 급할 때 쓰라고 건네준 지갑이 그렇다.
밀짚모자는 레돈도비치 길거리에서 가방장사할 때 햇빛 가리개로 썼던 것이다. 친척이 준 지갑 안에는 25년전에 넣어준 100달러짜리 지폐 다섯장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박사장은 밀짚모자를 쳐다보면서 정신 재무장을 한다고 한다. 친척이 준 지갑과 그 안에 담긴 500달러는 정말 쓰고 싶을 때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손 대지 않고 지금까지 갖고 있기에 이르렀다.
“그 친척분은 아마 도저히 못 살겠으면 귀국하는 비행기값으로 쓰라고 줬겠지요. 정말 그렇게 쓰고 싶었지만 얼마나 많이 참았겠습니까.”
박 사장은 어쩌면 구질구질하고 청승맞을 법한 낡은 소지품들로부터 오늘날 수억달러의 거래규모를 자랑하는 거상(巨商)이 될 수 있었던 인고의 힘을 얻었던 듯 싶었다. 밀짚모자와 친척의 지갑만큼이나 오래된 에피소드 또한 박사장의 성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서를 제공한다.
# 1970년대 말 명동에서
자고 나면 아파트 한채 값이 벌릴 정도로 증권 투자에 흠뻑 빠져 있던 시절 증권거래소를 들락거리면서 자주 들르던 서울 명동의 빈대떡 집이 있었다. 날마다 빈대떡을 구워 팔던 주인 할머니는 명동에 건물을 갖고 있을 만큼 알부자였다. 어느날 빈대떡 집에서 군인들과 젊은이들 몇이 패싸움을 벌였다. 아수라장이 된 식당을 치우던 할머니가 “더러워서 이 장사 못해 먹겠다”고 푸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러게 뭐하러 이런 장사를 하느냐.”라며 증권거래를 하면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다고 부추겼다. 박씨가 자랑스럽게 주식으로 돈 번 얘기를 늘어놓자 가만히 듣고 있던 빈대떡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끼, 이 놈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렇게 버는 돈은 내 돈이 아닌 게야.”
쫓겨나듯 빈대떡집을 나서면서 박씨는 그 할머니가 참으로 어리석고 답답해 보였다.
“평생 빈대떡이나 구워 팔면서 사시는 수 밖에 없겠지…”
외국어대 무역학과 다닐 때부터 증권에 손을 대 학생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큰 돈을 만졌던 박씨에게 세상은 참으로 우습게 보였던 시절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돈이 들어온다는 오만에 잔뜩 부풀어 있던 박씨는 1979년 10·26사건으로 한국의 정치상황이 급변하면서 주가가 폭락하자 순식간에 빈털털이 신세가 됐다.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세살난 아들과 갓 태어난 둘째 아들, 아내와 제주도로 쫓기듯 건너가 숨어살다시피 하던 10여개월 동안 명동 빈대떡 할머니가 소리치던 말이 내내 머리에서 맴돌았다.
#1981년 여름 LA의 땡볕거리에서
햄버거가게에서 한달에 쥐어주는 600달러로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아 그만 둔 뒤 레럿돎紂×【?고교 선배가 운영하던 주유소의 한쪽 모퉁이에 자리잡고 가방 행상에 나섰다. 쏟아지는 땡볕을 막기 위해 밀짚모자를 쓰고 하프갤론짜리 물통을 비워가며 고래고래 악써가며 가방을 팔았다. 더위에 물을 많이 마신 만큼 소변을 자주 봐야 했지만 행여 자리를 비운 사이 가방을 도둑 맞을까 싶어 꾹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참았던 소변이 땀으로 새어나왔는지 한참 있다보면 팔뚝 위에 허연 소금기가 자리잡았다. 슬쩍 혓바닥을 대보니 소금 맛 그대로 짭짤했다.
“머리로만 생각했던 땀의 의미를 그때 알았지요. 내가 흘린 땀을 맛보고 깨닫게 된 그 의미가 뭐겠습니까.”
돈 벌이의 고난스러움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생각난 사람은 또 한번 명동 빈대떡 할머니였다.
■ 기업 성공의 요체는
박사장은 에베레스트 가방의 성공한 요체를 품질과 신용 그리고 가격경쟁력이라고 꼽는다. 특히 신용을 자랑한다. 수표를 부도내지 않은 신용도 중요하지만 고객으로부터 믿음을 잃지 않은 게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에베레스트가 공급한 가방은 평생 워런티입니다. 품질에 조금만 하자가 있어도 반품을 받고 환불해줍니다. 그러니 도소매업자들은 물론 일반 소비자들이 에베레스트 가방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질지 말하지 않아도 되지요. 워런티 때문에 들어가는 경비요? 그런 것에 연연하면 당장은 이익이 될 지 몰라도 결국 손해보고 맙니다. “
사람이든 기업이든 믿을 수 있어야하고, 장사는 길게 보고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기업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랜 세월 고객의 신뢰를 쌓는 노력이 있어야지요. 에베레스트라는 상표가치가 좋은 브랜드라는 인식이 퍼지기까지는 그런 노력이 십년 이십년의 시간동안 쌓였기 때문입니다.”
■ “사람이 우선이다”
박사장은 기업이 장수하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이 좋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아무리 시스템이 발달해도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가도 변할 수 없는 소신이다. 문제는 좋은 사람을 어떻게 만나느냐에 있을 터이다.
“그렇지요. 다른 곳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어디가나 마찬가지라는 기준을 갖고 있지요. 남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세는 오만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노’라고 한 사람을 채용하면 반드시 화근이 되거든요.”
일단 선택한 사람을 좋은 임직원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그의 몫이다.
“내가 햄버거 가게를 그만 두고 가방장사를 시작했던 것은 결국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일단 직원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합니다. 생계를 걱정해가면서 어떻게 회사일에 전념하겠어요?”
에베레스트의 직원들은 10년 이상 근속자가 수두룩하다. 의료보험등 베네핏에서 한인 로컬 기업 어느 곳도 부럽지 않은 혜택을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일은 누구든지 한다 “라고 일갈하는 박사장은 “부가 축적되면 주변에 베풀어야 한다”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아울러 더 큰 돈이 모이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므로 자신이 받은 그러한 복을 분배해야 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 사업가의 운(運)이란
대부분의 사업가들이 운(運)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박사장은 어쩌다 찾아오는 게 운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노력과 아이디어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보살핌이 결합되다보면 그게 운이겠지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보살핌이라면…?
“글쎄요. 인간세계의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게 있지 않습니까. 종교적으로 그런 걸 신의 가호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흔히 조상님이 도와줬다고 말하는 경우같은 것이겠지요.”
스왑밋을 쏘다니던 시절 박사장은 낮엔 LA거리에서 행상을 하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샤워를 한 뒤 밤 9시나 10쯤 북가주 산호세나 샌프란시스코, 애리조나, 네바다 등지를 향해 낡은 승용차에 가방을 잔뜩 싣고 출발하곤 했다. 새벽 4시까지는 도착해야 스왑밋에서 좋은 목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졸려도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허벅지를 꼬집고,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도 쏟아지는 졸음을 어쩌지 못해요. 나도 모르게 핸들을 쥔 채 잠이 들어버리기 일쑤인데 갓길로 차가 벗어나 덜커덩거리면 화들짝 놀라서 깨고…그렇게 졸음운전을 몇달씩 해가면서도 사고를 당하지 않은 걸 보면 보이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도와준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요.”
회사를 차리면서 기왕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처럼 되자는 뜻에서 에베레스트로 이름을 정하고 상호 등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운이었던 셈이다.
“그런 좋은 이름을 아무도 상호로 등록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신기하잖습니까. 그런 게 운이지요 뭐.”
■ 신용은 장사 수완에서
박사장은 거리에서 행상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체크 바운스를 내 본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하게 신용을 중시했다.
행상과 스왑밋을 전전할 때 주말 장사를 위해 2천달러어치 물건을 사면 그 중 절반은 캐쉬로 치르고,나머지는 체크를 끊는다. 금요일에 내준 체크가 바운스되지 않으려면 주말 동안 어떡하든 1천달러어치를 팔아 월요일에 은행에 입금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모자라는 밑천을 때워가던 어느 주말 위기(?)가 왔다. 거리에 좌판을 벌렸는데 비가 오는 거다.
“가방 장사에게도 비가 내리면 공치는 거지요. 큰일이다 싶었지요. 월요일에 입금 못하면 부도나는 거 아닙니까. 어떡하나 걱정하다 못해 팔려고 내놓은 비에 젖은 가방 한개를 열다보니 패킹페이퍼가 젖지 않은 채 그대로인거예요. 방수가 되는 가방이었던 거지요. 얼른 사인판에 ‘Water Proof Bag Only $ 5′라고 써붙이고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똑같이 소리쳤더니 사람들이 몰리더군요. 2천달러어치를 다 팔아치웠지요.”
길거리 가방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나자 이 사람 저 사람이 찾아왔다. 40% 쯤 되는 마진만큼 크레딧을 주고 가방을 공급해주기 시작했다. 홀세일을 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좋은 자리를 새로 할 사람에게 내주고 자신은 또 다른 목을 찾아내 가방을 팔았다. 그런 식으로 ‘가방유통망 ‘을 늘리는 한편 박 사장 스스로도 북가주와 텍사스주에 이르기까지 곳곳의 스왑밋을 찾아다니는 발품팔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방 행상으로 돈을 벌어 이민 온 지 2년여만에 에베레스트를 상호 등록하고 회사를 차릴 정도였다면 얼마나 억척스러웠을지 상상이 간다.
■ 박병철 사장은
부산 경남중고와 외국어대 무역학과를 나와 1973년부터 일본 미쓰이 종합상사 서울지사에서 4년여 일하면서 무역실무를 익혔다. 미쓰이 재직시절이던 1975년 고대 경영대학원에서 무역론을 전공하기도 했다. 1978년부터는 3년여 종합상사 (주)삼화에서 일했다. 대학시절부터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 손을 대 큰 돈을 벌었으나 10·26 등으로 한국사회가 혼란기에 빠져들면서 재산을 탕진, 1981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햄버거숍에서 막일을 하면서 한달에 600여달러를 받았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미국으로 건너올 때 주재원 신분을 내줬던 한국의 강성물산이란 곳에서 LA에 수출해둔 가방 재고물량을 팔아보라는 권유로 거리행상과 스왑밋 등에서 가방장사에 나섰다. 현재 해외한인무역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 에버레스트 트레이딩은
에베레스트 트레이딩(Everest Trading Corp.)은 100 종 이상의 각종 용도별 가방에 ‘에베레스트’라는 브랜드를 붙여 공급하는 대형 가방 유통 무역회사이다. 중국과 스리랑카에 제조 공장을 두고 있다. 주문자 상표 부착(OEM) 생산이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넘는 가방 전문 제조업체인 중국과 스리랑카의 공장은 박병철 사장의 친동생이 직접 경영한다. LA에 있는 에베레스트 트레이딩은 자체 브랜드인 에베레스트 가방을 보급하는 일을 전담하고 있다. 1988년 허리 춤에 차고 다니는 소형 색인 이른바 패니백(Fanny Bag)을 제조 공급하면서 에베레스트를 가방 용품의 세계적인 파워 브랜드로 퍼뜨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 황덕준 / 미주판 대표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