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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응답하라 1994′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개인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겠지만 20년 전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를 보며 ‘그래, 그 땐 저랬어. 좀 힘들었어도 낭만은 있었지’라고 미소를 짓는 사람이 많았으리라.
만약 ‘응답하라’ 시리즈를 LA 판으로 만든다면 어떨까? 1990년대 초반 LA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파란만장한 시절이었다.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억척스럽게 일을 하며 쌓아 놓았던 것들이 흑인 폭동과 노스리지 대지진이 이어지며 신기루로 변해 버렸다. 이 때 한인들의 허무한 마음을 달래 준 것은 라디오였다. 그 중에서도 라디오코리아의 간판 프로그램 ‘동네방네 쇼’의 인기는 정말 폭발적이었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의 완벽한 성대모사로 유명해진 방송인 박광해 씨의 인기는 본국의 어지간한 연예인 못지 않았다.
약 16년간 진행된 ‘동네방네쇼’는 무려 5천회 이상이 방송되며 한인들의 친근한 벗이 됐다. LA 판 ‘응답하라’가 만들어진다면 당시 최고의 라디오스타 박광해 씨의 방송을 들으며 울고 웃는 청취자들의 모습이 담겨져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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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스타일
박광해 씨는 1989년부터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으니, 어느덧 25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지금도 그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전형적인 기계치라 아예 관심이 없다. 휴대폰은 그야말로 전화를 걸고 받는 용도로만 사용된다. 상대방 번호를 저장하는 법을 몰라 수첩에 일일이 적는 스타일이다. 이메일도 할 줄 모른다. 예전 라디오코리아 제작국 그의 책상에는 컴퓨터가 놓여져 있지만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오랜기간 방송국에 몸 담고 있었지만 직책은 늘 ‘방송 위원’. 타이틀에 전혀 연연하지 않은 그의 관심은 오직 방송 뿐이었다. 2시간 방송을 마치고 나면 팬들로부터 걸려오는 수십통의 격려 전화를 받으며 행복을 느끼곤 했다.
◆인기절정 동네방네쇼
박광해씨는 라디오코리아의 인기프로그램 ‘동네방네쇼’의 진행자로서 10여년 동안 인기를 누리며 미주한인사회에서 거의 유일한 ‘라디오스타’로 자리해왔다.<사진=이은호 작가>
◆인간복사기
그의 성대모사 실력은 한국 최고라는 개그맨 최병서와 견줘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그의 고향은 마산. 5살 때 서울로 올라왔는데 가장 자신있는 것은 경상도가 아닌 전라도 사투리란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일단 유명 인사의 연설이나 방송하는 것을 유심히 들어 봅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내가 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죠.” 한 번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초대를 받기도 했다. “대통령 측근에서 소문을 듣고 ‘정말 똑같이 흉내내는 사람이 있다’며 추천을 한 모양이에요. 좀 떨리긴 했지만 대통령 앞에서 목소리 흉내를 냈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같이 사진을 찍자 그럽디다.” 박광해 씨가 가장 자신있는 성대모사는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이다. 전직 대통령들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 화려한 라인업을 혼자서 흉내내며 세태를 풍자한 ‘청화대 원로회의’는 그의 출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구중계
최초의 코리언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던 시절부터 박광해 씨는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부사장(당시)과 함께 야구 중계를 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 점잖은 스타일의 방송에 익숙해 있던 청취자들에게 이들의 중계 방송은 획기적이었다. 탁월한 성량을 가진 그는 1회초부터 힘차게 방송했다. “쳤습니다. 크다. 크다.”라고 외치는 그의 멘트에 청취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지만 실상은 1루쪽 파울플라이볼. “박찬호 좌익수 플라이로 처리하고 이닝을 마칩니다”라는 그의 말에 최영호 부사장은 “박광해 씨, 좌는 왼쪽이에요. 우는 밥 먹는 손이고. 좀 전에는 우익수 플라이었어요”라고 타박해 청취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키가 6피트7인치나 되는 리치 섹슨이라는 타자가 나왔을 때는 “정말 크군요. 전봇대가 따로 없어요”라고 멘트를 쳐 청취자들을 뒤로 넘어가게 만들었다.
◆홀연히 마이크를 놓다
“광고주의 제품 홍보로 채워지는 방송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꼈다” 박광해씨는 한인사회 라디오방송이 상업광고 일색으로 채워지는 데 환멸을 느껴 마이크앞을 떠났다고 한다.<사진=이은호 작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방송을 해야 하는데, 어느날 문득 내 자신을 돌아보니 입으로만 방송을 하더군요. 게다가 만병통치약이라며 거품을 물고 과장 광고를 하는 광고주들의 비위를 맞춰줘야만 하는 일도 점점 많아지다보니 회의가 들더군요.”
송년회 사회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순서도 없이 두 세시간 동안 거의 원맨쇼를 해야 하는 열악한 조건에 밤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식구들까지 예민해진 그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술로 공허한 마음을 달래 보려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오랜 고민 끝에 과감히 마이크를 놓기로 결심했다. 3년 전의 일이었다.
“방송을 할 때도 생계를 위해 부업으로 코인런드리를 했었죠. 천직이라 생각했던 방송 일을 그만두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해지더군요. 매일 생방송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치게 되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방송인 박광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버리고 아내와 함께 비록 작은 규모지만 코인런드리 사업에 매진했다.
“예전에는 마누라 속을 참 많이 썩혔죠. 워낙 사람을 좋아하다보니 가족은 뒷전이고, 룸살롱을 전전하며 술을 벗삼아 살았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이제 담배도 끊고 술도 집에서 와인만 마시고 있습니다. 못난 남편을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애들 엄마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솔잎이 그리운 송충이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마이크를 놓은 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 한 켠에는 방송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다.
“같은 일을 너무 오래하다보면 누구나 타성에 젖게 마련입니다. 제가 그랬어요. 그냥 입만 가지고 방송을 한 거에요. 초창기 때처럼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있는 방송을 할 자신이 생길 때 다시 마이크를 잡고 싶어요. 현재로서는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나 자신도 몰라요. 박광해를 아껴주셨던 청취자 분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난 것 같아 늘 아쉬웠습니다. 다시 복귀한다면 정말 청취자들을 위한 따뜻한 방송을 하고 싶습니다. 그 날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며 칼을 갈고 있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인터뷰를 마친 그의 표정에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느껴졌다.
손건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