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방송 중계와 시청자의 태도 변화

-‘누가 중계하냐‘에 대한 관심이 커져

[헤럴드경제=서병기 선임기자]필자는 1994년 체육기자로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취재하기 위해 노르웨이에서 거의 한달간을 머무른 적이 있다. 당시 이규혁은 중학교 3학년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계올림픽은 한국과는 거리가 먼 남의 나라 잔치를 취재하는 것 같았다. 한국은 1924년 1회(프랑스 샤모니)부터 1988년 15회(캐나다 캘거리) 대회까지 메달을 한 개도 따지 못했다. 메달을 따게 된 것은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부터다. 김기훈이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땄고,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에서 금을 추가해 금메달 2개로 10위를 기록했다. 릴레함메르 대회때는 김기훈(쇼트트랙 남자 1000m)과 채지훈(쇼트트랙 남자 500m), 전이경(쇼트트랙 여자 500m)이 금메달을 땄고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에서 금을 추가해 금메달 4개로 종합순위가 6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하지만 두 대회 모두 쇼트트랙에서만 금메달이 나왔다.


동계올림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피겨스케이팅과 스키종목에는 메달을 딸만한 선수가 없어 중계를 해도 큰 관심은 없었다. 릴레함메르 스키경기에는 한국의 유일한 알파인 스키 선수였던 허승욱(당시 연세대)이 활강 출전을 포기할 정도였다. 먼 곳까지 날아와 대회 출전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비판적인 기사를 쓰려고 했다가 안썼던 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그런 기사를 썼다면 무식함을 드러낸 꼴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가파른 슬로프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허승욱이 활강 경기에 출전했다면 위험 천만한 행위라는 것을 나도 잘 몰랐다.

알베르빌과 릴레함메르때만 해도 올림픽 중계는 철저하게 메달 중심주의였다. 우리가 메달을 딸 가능성이 높은 쇼트트랙에만 집중했다. 다른 종목은 화제성, 가십성 위주였다. 이런 중계 성향은 계속 이어졌다.

근대 올림픽 창시자인 피에르 쿠베르탱은 “올림픽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했고, 스포츠를 응원하면서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 다음 문제다” “출전에 의의가 있다”고 말하곤 했지만막상 패하고 나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등 아마추어 스포츠 경기 종목에는 포상금과 연금 점수가 걸려 있다. 원래 포상금 제도는 스포츠를 통해 강한 힘을 가진 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일률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산물이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자유주의 국가나 자본주의에서 어울리는 제도가 아니다.

연금이 걸려있으면 선수들의 눈빛부터 달라진다. 연금의 최고봉 대회가 바로 올림픽이다. 그러니 방송 중계도 그 분위기에 편승하게 된다. 방송중계의 캐스터나 해설자의 말에는 국가주의가 묻어있고, 민족주의적이거나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흐를 소지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과거 아마추어 레슬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연속해서 딴 미국의 존 스미드라는 선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아리조나주의 썬키스트 클럽에서 레슬링을 하는 그에게 어떤 보상이 있었냐고 물어봤더니 의아해 하면서 “메달이 전부다. 우승은 명예다”고 말했다. 돈이 조금도 생기지 않는 메달리스트에 도전하는 이유는 오로지 “좋아서”다. 그런 나라와 우리나라의 스포츠 중계방식이 같을 리 없다.

하지만 이번 소치동계올림픽 중계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메달에 대한 집착이 확실히 줄었다는 사실을 중계와 보도를 통해 체감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금메달 위주의 중계를 하고 기대한 선수가 메달을 놓치면 선수건, 감독이건, 협회건 책임 소재를 찾아 단죄(?)하는 식의 보도를 일삼곤 했다.

하지만 소치대회때는 메달을 못딴 선수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동계올림픽에 무려 6차례나 출전했지만 메달을 따지 못하고 퇴장한 스피드 스케이트의 이규혁 선수에게도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물론 4년뒤에 열리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있기에 최고의 성적을 낸 선수뿐만 아니라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조명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메달을 따야 한다는 강박이 아니라 즐기는 것에 대한 관심이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시청자들도 스포츠를 대하는데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스타 선수 위주의 방송을 하기도 했지만, 컬링이나 여자 아이스하키, 프리스타일 스키 등 비인기 종목 등을 중계하며 다양성을 꾀하고 룰과 제반사항을 알려주며 인식 변화를 유도한 것도 바람직한 변화였다. 여자 컬링은 4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선수들은 큰 인기를 얻었다. 중계도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아직은 생소한 컬링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지에 비중을 두었다. 돌아와서도 4명의 선수들은 방송사와 신문사를 돌며 인터뷰하기에 바빴다. 과거 같으면 금메달리스트 같은 행보(?)였다.

세계적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바네사 메이가 알파인 스키의 태국 국가대표로 데뷔전을 치러 꼴찌로 완주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올림픽에서 꼴찌에게 환호를 보내는 모습은 토픽감으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승부를 초월한 관전 태도와 중계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아쉬운 판정으로 금메달을 못 딴 게 소치의 한으로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나보다 더 간절한 사람에게 메달이 갔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김연아의 인터뷰가 더 금메달감이었다. 김연아의 대인배 인터뷰는 더욱 오래 기억될 명장면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의 중계에서 석연찮은 판정을 운운하며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금메달에 대한 집착은 많이 벗어난 셈이다.

소치올림픽이 열리는 동안과 폐막후 방송된 보도멘트와 기업광고에도 유난히 “수고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있어 행복했다”는 문구가 많았던 것도 이를 방증한다.

이번 소치올림픽 중계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변화는 중계하는 사람의 인지도를 매우 중시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스포츠 중계 자체의 전문성과 완성도로 지상파 3사가 경쟁하는 체제였다면 이번에는 누가 중계를 하느냐가 큰 화제였다. 과거에는 이경규 같은 예능인은 스포츠 중계와는 별도로 예능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응원하는 장외의 모습을 담았으나, 이번에는 아예 연예인이 스포츠 중계에 들어왔다는 점이 달라진 풍속도였다.

그렇게 해서 소치동계올림픽을 중계한 김성주(MBC)와 강호동(KBS)이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김성주는 아나운서 출신이지만 ‘아빠 어디가‘ 등을 통해 인지도가 올라가 이제는 연예인(예능인)이라고 볼 수 있다.

MBC와 KBS는 각각 김성주와 강호동을 앞세워 이슈몰이를 해나갔다. 두 사람의 중계를 마치 대결구도로 몰고가는 보도들도 나왔다. 스피드 스케이팅 남·여 500m 경기에서 시청률 결과를 가지고 각각 한차례씩 이겼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중계방송에 연예인이 있다 보니 이들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둘은 포지션이 달랐다.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중계 경험이 있는 김성주는 전문 캐스터 출신이다. 반면 강호동은 캐스터와 해설위원이 있는 상태에서 특별해설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니 두 사람이 경쟁한다고 볼 수 없었다. 굳이 김성주의 경쟁상대를 따진다면 베테랑 스포츠 전문 캐스터인 서기철 아나운서였다. 김성주와 강호동의 중계 우열을 가리는 것은 축구에서 수비수와 공격수의 기량을 직접 비교하고, 농구에서 센터와 가드의 성적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포지션에서 잘했다. 김성주는 차범근 해설위원과 함께 축구 중계로 유명해진 아나운서답게 이번 올림픽에서도 정확한 발음과 안정적인 톤으로 중계를 이끌었다. 김성주는 단조로운 언어를 구사한 손세원 해설위원과는 대조적으로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빙속 여제’ 이상화 경기에서 속사포처럼 쏟아낸 스피디한 중계는 큰 힘을 발휘했다. 김성주는 스피드 스케이팅 1000m에서 메달권 입상에 실패한 모태범과 이규혁, 김태윤 선수에게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동네 예체능‘의 소치 참가를 위해 현지로 간 강호동은 특별 게스트 또는 보조해설자로 좋은 역할을 보여주었다. 동계스포츠가 주전공은 아니지만 많은 사전조사와 공부를 한 흔적이 역력했다. 씨름선수 출신으로 운동선수 입장에서 심리상태를 설명하고, 시청자 입장에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말해 나윤수 해설위원과 겹치지 않는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갔다. 말하는 분량에서는 김성주의 5분의 1도 안됐지만 각양각색의 표정 변화를 통한 무언(無言)의 중계로 시청자를 뭉클하게 하기도 했다.

강호동은 이상화 선수가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에서 우승하자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한 이 종목 한국 선수들에게도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호동은 친근하고 활력소 같은, 그러면서도 운동선수 특유의 감각을 보여주며 호평을 이끌어냈다.

SBS의 중계팀에는 ‘별에서 온 그대’의 주연배우들을 예고방송에 출연시키기는 했지만 중계방송에 연예인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성재 아나운서가 스피드 스케이트 중계에서는 그런대로 좋은 역할을 해냈다. 배성재 아나운서는 마지막 경기를 펼치는 이규혁 선수를 두고 “지금 이규혁 선수는 두 바퀴 반을 돌고 있지만 지금까지 지구를 몇 바퀴 돌았는지 모릅니다”란 말을 해 여운을 남겼다. SBS 중계는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와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 배성재 아나운서는 ‘힐링캠프‘에 이상화가 출연했을 때 함께 나와 보다 전문적인 지식으로 인터뷰를 도와 토크쇼의 수준을 높였다.

SBS는 오랜기간 피겨스케이팅 중계방송에 집중해왔다. 지난 1990년대 초반 국제 빙상연맹(ISU)으로부터 방송권을 구매해 국내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중계를 꾸준히 해왔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가장 많이 보도하고 준비를 많이 한 방송사다. 트리플 악셀 등 피겨기술과 용어들을시청자들이 점점 익숙해지도록 하는 데도 SBS의 기여도가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소치 올림픽 중계의 시청률에서도 SBS가 KBS와 MBC를 누른 적이 많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배기완 캐스터와 방상아 해설위원은 김연아 선수가 시니어로 데뷔한 2007년을 포함해 오랫동안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함께 중계방송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호흡이 척척 맞았다. 두 사람은 피겨 스케이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깔끔한 중계를 이끌었다. 또 여느 중계진보다도 김연아 선수와 친밀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더욱 섬세하고 친근한 중계 방송을 이끄는데 유리했다. 특히 소치올림픽의 한국 해설위원중 유일한 성화봉송 주자이기도 했던 방 위원은 선수들을 향해 후배 대하는 듯한 친근한 해설을 선보여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이번 소치동계올림픽 중계를 보면 메달에 대한 집착이 전에 비해 줄었고, 중계방송에 예능인을 활용한 것도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시청자의 수용태도를 반영하는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즐기는 스포츠로 가고있음이 감지된다. 하지만 아직 선진국 수준은 아니다.

스포츠는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심신을 단련하고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다. 엘리트 스포츠는 건강과 여가 활동으로 하는 생활체육과 연계돼 발전해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단계에 와있지 못하다. 4년뒤 열리는 평창 동계올림픽에는 방송제작자나 시청자 모두 좀 더 스포츠를 여유있게 즐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서병기선임기자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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