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 공포가 밀어 올린 약 생산…글로벌 공급망 ‘각자도생’ 가속

2025년 생산 9.1% 급증…선행 공급 영향
트럼프RX-빅파마 빅딜…공급망 안보 중심
중국 혁신 허브 부상…유럽은 경쟁력 하락


[트럼프Rx 홈페이지 갈무리]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보호무역주의가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의 생산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관세 장벽이 높아지기 전 물량을 미리 확보하려는 글로벌 제약사들의 ‘선행 공급(Front-loading)’ 전략이 맞물리면서, 지난해 전 세계 의약품 생산량은 유례없는 폭발적 증가세를 기록했다.

관세 폭탄 피하려 ‘공장 풀가동’…아일랜드 41% 폭증


금융서비스 기업 아트라디우스의 ‘2026년 1월 제약 산업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전 세계 의약품 생산량은 전년 대비 9.1% 급증했다. 이는 미국의 수입 관세 부과가 본격화되기 전 서구권 국가들이 선제적으로 물량을 밀어낸 결과다.

특히 유럽 지역의 대응이 가장 긴박했다. 영국과 유럽연합(EU)은 지난해 생산량을 21.6%나 끌어올리며 관세 장벽에 대비했다. 그중에서도 글로벌 의약품 제조 허브인 아일랜드는 무려 41.3%의 생산 급증을 기록하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러한 ‘반짝 특수’는 올해 기저효과와 긴축 정책으로 인해 일시적인 냉각기에 접어들 전망이다. 2026년 글로벌 의약품 생산 증가율은 1.6%에 머물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지난해 생산량을 대거 늘렸던 아일랜드(-6.4%)와 영국·EU(-3.7%)는 일시적인 역성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RX’와 빅파마의 빅딜…공급망의 정치화


단순한 생산량 수치보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미 행정부와 빅파마 간의 구체적인 ‘빅딜’이다. 일라이 릴리, 노보 노디스크, 화이자, 머크 등 주요 제약사들은 관세 면제를 받는 조건으로 ‘최혜국(MFN)’ 프레임워크에 따른 약가 인하에 전격 합의했다. 이들은 2026년 초 가동 예정인 정부 직거래 웹사이트 ‘트럼프RX’를 통해 주요 의약품을 인하된 가격으로 공급하고, 미국 내 R&D 및 제조 시설을 대폭 확장한다는 약속을 내놨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이 ‘효율성’ 중심에서 국가 ‘안보’와 ‘정책적 리스크 관리’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각국 정부는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전략적 비축을 늘리고 자국 내 제조 시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보고서는 향후 제약 산업에서 정부의 산업 정책이 가장 핵심적인 변수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의 질적 도약과 유럽의 경쟁력 위기


미·중 갈등의 파고 속에서도 중국은 단순 제조 기지를 넘어 ‘혁신 허브’로 진화하며 독자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중국은 전 세계 활성의약품성분(API) 생산량의 약 40%를 점유하고 있는데, 현재 API는 미국의 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어 그 영향이 제한적이다.

나아가 중국은 질적인 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2025년 상반기 기준 글로벌 대형 제약사 라이선스 계약의 3분의 1이 중국 기업과 체결되었으며, 전 세계 임상 시험의 30%가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는 10년 전 5%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반면 유럽 제약업계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느린 임상 승인 절차와 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인해 미국·중국과의 혁신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5~2030년 연평균 투자 성장률(CAGR) 전망치를 보면 중국(4.5%)과 미국(3.0%)에 비해 유럽(2.2%)은 경쟁력이 하락하는 추세다.

지정학적 긴장과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글로벌 공급망은 더욱 파편화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 역시 이러한 공급망 재편과 미국의 약가 통제 정책, 그리고 중국의 급부상에 맞춘 정교한 대응 전략 수립이 시급한 시점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관세 파동이 글로벌 의약품 공급망의 ‘분산’과 ‘자국 우선주의’를 고착화시킬 것으로 진단한다. 지정학적 긴장이 지속됨에 따라 각국 정부는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의약품의 전략적 비축을 늘리고 국내 제조 시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바이오협회는 “각국 정부가 의약품 수입 의존도를 줄이고 전략적 비축 및 국내 제조를 장려하는 노력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향후 제약산업에 대한 정부 정책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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