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생존 넘어 위대함으로”…K-메디치에 답 있다

3%의 기적, 기부 넘어 사회적 투자로
예산 반영 안된 아티스트 기량 지원
“민간 후원은 지속성 위한 필수 기반”

예술역량→관객신뢰→수익 ‘선순환’
후원회와 ‘어떤 철학 공유하느냐’ 중요
초개인화 마케팅·세제 혜택 등도 필요

국립발레단 ‘지젤’ 공연 [국립발레단 제공]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꽃피웠던 것은 예술가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메디치가(家)가 있어 가능했습니다. 예술가들에게 후원은 지속가능한 예술활동을 위한 자양분이 되죠. K-컬처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그들’이 있어 글로벌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헤럴드경제는 새해 기획으로 우리 예술가들을 뒤에서 후원해 온 ‘K-메디치’를 조명합니다.

화려한 무대 위 커튼콜의 환호가 잦아들 무렵,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비밀스런 통로에선 또 다른 공연이 시작된다. 1200석을 가득 메운 일반 관객에겐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구역’.

국립발레단 후원회원들은 이곳에서 중력을 거스르며 비상하던 무용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땀방울을 마주할 수 있다. 토슈즈 속 짓이겨진 발, 공중을 떠다니는 파스 냄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몸짓, 그 이면의 세계다. 예술의 원초적 민낯을 목격한 후원자들의 눈빛은 이내 달라진다. 아름다운 예술을 빚기 위해 수도승처럼 자신을 몰아세운 무용수들의 ‘1분 1초’를 온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김현아 국립발레단 팀장은 “백스테이지 투어를 경험하면 발레를 단순히 ‘공연’으로만 보던 시각이 완전히 바뀐다”며 “하나의 무대를 위해 흘린 숭고한 노력을 마주하는 순간, 투어는 후원에 대한 단순한 혜택이 아니라 특별한 경험이자 선물이 된다”고 말했다.

고도의 전략은 예술의 가치를 깨운다. 국공립 예술 단체는 ‘국고’에 의존하지만, 이들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K-메디치’에 있다. 때론 “세금도 내는데 왜 기부까지 해야 하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기꺼이 지갑을 열어 목마른 나무에 물을 준다. 예술계 관계자들은 “세금이 단체의 ‘생존’을 지킨다면, 후원금은 ‘위대함’으로 도약하는 발판”이라고 입을 모은다.

‘3%의 기적’…국가 보증 우량주를 향한 투자

‘평균 3%.’ 국립예술단체의 한 해 예산 중 후원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국립예술단체 기준 한 해 예산은 약 100억원 내외. 국고 보조금과 지자체 지원금은 단체 재정의 약 80%를 차지(2024년 전문예술법인단체 백서)한다. 자체 수입은 18% 안팎. 민간의 자발적 후원은 팬데믹 이후 더 줄어 2021년부터는 1%대를 기록하고 있다. 범위를 민간 문화예술단체까지 넓혀도 기부금 비율은 총 재원의 3%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3%가 갖는 의미는 거대하다. 이는 국가가 보증하는 ‘최고의 우량주’를 향한 강력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은 2024년 창단 역사상 최초로 후원회를 발족했다. 회원 수는 총 42명. 국립극단 관계자는 “후원회는 국립극단의 재정적 자립도를 확보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산이자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출연기관인 서울시립교향악단도 마찬가지다.

서울시향 관계자는 “클래식 공연은 대규모 인력이 투입되는 고정 인건비 구조라 출연금과 티켓 판매만으로는 충당이 어렵다”며 “민간 후원은 재단의 지속성, 경쟁력, 자율성 확립을 위한 필수 기반”이라고 설명했다.

국립예술단체는 수익 창출만을 목표로 삼을 수 없는 태생적 특성을 갖는다. 수익 확보와 공익 보전 사이의 균형, 즉 ‘운영의 묘’가 절실하다. 공익을 위해 다양한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손실, 그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후원이다.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등 재정 규모 100억원 이상인 국내 문화예술기관 11곳의 평균 재정 자립도는 10.7%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은 지난 3년간 32.3%를 달성했고, 2025년 후원·협찬 비용은 역대 최대인 16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최대 규모인 예술의전당은 후원회비가 100억원을 넘는다.

그렇다고 민간 후원을 부족한 예산을 채우는 ‘땜질’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후원은 예술단체가 문화 향유 확대라는 공익을 달성하면서도, ‘생존’ 단계를 넘어 ‘위대한 예술’의 단계로 도약하게 만드는 유일한 사다리이기 때문이다.

국립발레단 후원회장인 송병준 컴투스 의장은 “후원 활동을 단순히 재정 지원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엔 한계가 있다”며 “재정적 지원은 출발점일 뿐, 본질적인 역할은 한국 예술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문화적 품격을 당당히 보여줄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토슈즈부터 ‘실패할 권리’까지…후원금의 비밀스런 용처

규모는 제각각이나 저마다 확보한 후원금은 예술계 전반의 건강한 진화를 이끌고 있다.

국립발레단의 후원금은 100% 단원들의 기량 향상과 복지에 쓰인다. 세계 유수 발레단과 경쟁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예술단체의 정부 예산은 공연 제작비와 인건비 같은 경직성 경비로 묶여있다. 이에 국립발레단은 단원들이 매일 사용하는 연습실 탄성 마루(댄스 플로어) 교체나 한 켤레에 수십만원 하는 토슈즈를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해외 게스트 티처를 초청해 마스터 클래스를 여는 것도 후원금이 있어 가능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악기 구매 및 수리, 교육 프로그램 등 특별 사업에 후원금을 활용한다. 전속 단원이 없는 국립오페라단에 후원금은 일종의 ‘모험 비용’이다. 오페라는 대중성이 낮은 장르라 대다수 단체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라 보엠’,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등 익숙한 레퍼토리를 반복한다. ‘실패하지 않는 안전한 공연’은 단체의 성장을 가로막는 족쇄다.

국립오페라단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건 후원금으로 재정 안정성이 개선됐기 때문이다. 2024년 바그너 ‘탄호이저’에 이어 ‘트리스탄과 이졸데’, 2025년 ‘세 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 등 신선한 작품을 소개했다.

이승진 국립오페라단 부장은 “제작비가 많이 들고 난해하지만 예술적 가치가 높은 대작을 올리기 위해선 흥행 실패의 리스크를 감당해줄 재원이 필요하다”며 “후원금을 통해 재정적 안정을 꾀하고 공연의 퀄리티를 높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단원이 없는 국립극단도 더 좋은 연극을 올리는 데 후원금을 쓴다.

예산의 한계로 실현하지 못했던 해외 진출이나 실험적인 창작 작품 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숨통’이다. 국립극단 관계자는 “생계비나 월급 같은 안정적인 수입원이 확보되지 않은 연극인들의 창작 활동을 보조하는 데에도 기금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내가 키웠다”…팬덤이 된 후원자들

“내가 키운 우리 예술.”

후원회는 공연 생태계의 선순환을 만든다. 든든한 후원은 단체의 역량을 키우고, 높아진 수준은 관객의 신뢰를 부르며, 이는 다시 수익 향상으로 이어진다. 소위 “믿고 본다”는 대중의 확신은 매진 행렬로 증명된다.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성장하는 국립발레단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후원회에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이다. 후원회는 국립발레단을 함께 키우고, 평범한 무용수가 예술가로 나아가는 창조적 고행(苦行)을 지탱하는 ‘동반자’라는 효능감을 얻는다.

송병준 의장은 “단원들이 오롯이 예술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발레단이 우리 문화의 자부심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후원회의 방향”이라며 “단원들이 스스로 자긍심을 갖는 토대를 마련하는 일, 그것이 이 역할을 지속하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라고 강조했다.

국립오페라단의 도전은 관객 확장으로 이어졌다. 2025년 마지막 정기 공연이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 객석엔 20대 관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 철학 전공생 이민석(22) 씨는 “지난해 ‘탄호이저’를 보고 바그너 오페라에 반했다”며 “국내에서 바그너를 접하기 힘든데 국립오페라단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연한다고 해서 직접 예매해 A, B팀 공연을 모두 봤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후원회가 갖는 자부심, 즉 ‘나의 후원이 단체를 성장시켰다’는 효능감이 예술계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한다. 서울시향 관계자는 “후원자들이 클래식 음악 후원에서 효능감을 느끼면 그 영향이 다른 예술 분야로도 이어진다”고 했다. 실제로 국공립 단체 후원자 중엔 여러 곳을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후원하는 ‘N차 후원자’가 적지 않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민간 후원이 창작을 지원하고, 새로운 작품이 관객 확대로 이어져 예술의 장기적 자생력을 강화한다”고 덧붙였다.

‘키다리 아저씨’를 자처한 K-메디치들은 지난 수년간 묵묵히 예술 텃밭에 물을 주며 K-콘텐츠 성장을 이끌어왔다. 송병준 의장의 말처럼 “예술은 단순한 감상 대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화적 토대를 형성하고 다음 세대에 계승해야 할 자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송 의장은 “여전히 민간 후원 문화가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충분히 자리 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더 많은 기업과 개인이 예술 후원을 ‘기부’가 아닌 ‘사회적 책임이자 문화적 투자’로 인식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티켓 몇 장의 혜택보다 ‘철학’을 공유하라

사실 해마다 수백만원에서 수억원을 ‘기꺼이’ 내놓는 후원자에게 예술가들이 당장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공연계 관계자들은 “기껏해야 티켓 몇 장, 할인율, 리허설 참관 정도임에도 늘 든든하게 지원해줘 감사할 따름”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 후원회는 대부분 미국 모델을 벤치마킹했다. 백스테이지 투어나 살롱 문화를 통해 ‘정서적 유대감(스킨십)’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서구 유수 예술단체의 후원회는 물질적 지원 그 이상의 가치를 돌려준다.

일례로 미국 뉴욕 필하모닉이나 카네기홀의 고액 후원자는 단순한 기부자가 아니다. 이사회(Board of Trustees)의 일원이 돼 시즌 프로그램과 음악감독 선임에 관여하는 ‘권력’을 얻는다. “돈을 내거나, 돈을 받아오라(Give or Get)”는 철칙 하에 치열하게 기여하고, 그 대가로 ‘불멸의 이름’을 새기기도 한다. 로비 벽면은 기본이고 객석 의자, 악보 도서관, 심지어 화장실 문고리에까지 후원자의 이름이 남겨진다. 국내에선 예술의전당,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마포아트센터 등 여러 공연장의 곳곳에 후원자의 사연과 이름이 기록돼 있다.

영국 로열 발레단은 무용수들의 모닝 클래스(Morning Class)를 공개해 가장 내밀한 연습 과정을 공유한다. 파리 오페라 발레는 럭셔리 브랜드와 파트너십을 맺고 갈라 파티를 전 세계 셀럽들의 사교장으로 만든다. 후원자에게 “나는 이 화려한 세계의 일원”이라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다.

전문가들은 국내 후원 문화 활성화를 위해선 더 많은 제도적 혁신과 파트너십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제는 기관과 단체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조신애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팀장은 “후원회는 단체의 ‘철학과 미래’를 공유하는 핵심 공동체”라며 “문화예술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티켓 선예매 같은 서비스 격차는 좁혀질 것이다. 결국 든든한 지지 기반을 얻기 위해선 ‘무엇을 제공하느냐’보다 ‘어떤 철학을 공유하느냐’가 중요해진다”고 강조했다.

국립심포니가 진행한 ‘클래식 오감회’는 그 좋은 예다. 단순한 와인 파티를 넘어 ‘음악이 있는 삶’이라는 단체의 지향점을 후원자와 함께 체험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조 팀장은 “우리의 가치와 선택을 믿어주는 분들이기에 후원 프로그램 역시 우리만의 비전과 철학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후원 예우의 ‘초개인화(Hyper-personalization)’ 전략이기도 하다. 천편일률적 혜택이 아니라 후원자의 성향에 맞는 맞춤형 설계다. 국립발레단처럼 토슈즈, 댄스벨트 등 구체적인 항목의 기부금 사용처를 명시해 ‘웜 글로우(Warm Glow·기부 행위 자체에서 오는 기쁨)’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도 영리한 접근이다.

가장 즉각적인 유인책은 ‘세제 혜택’이다. 현재 국립 예술단체 지정 기부 시 소득의 10~20% 감면 혜택을 받지만, 이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공극장 관계자는 “K-콘텐츠의 기반인 순수예술은 공공 지원이라는 활주로에 민간 후원이라는 엔진이 더해져야 비상할 수 있다”며 “문화예술 후원이 단순 비용이 아닌 합리적인 ‘사회적 투자’가 되도록 제도적 길을 넓혀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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