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분이 첫 고비”…‘초비상’ 정유업계, 상반기 전체 플래닝 착수

수급 등에 각사 내부 시뮬레이션 진행
대체 원유 확보도 가격·설비 조정 부담
현재 최선인 비축유 방출도 임시 방편
수입 의존도 높아 사태 장기화 시 치명타
정유사 겨냥한 최고가격제까지 시행 목전


지난 2024년 2월 베네수엘라 푸에르토 카베요 위치한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기업 PDVSA의 엘 팔리토 정유소. [로이터]


[헤럴드경제=고은결 기자] “중동산 원유 대체를 위해 지금 당장 주문한다고 해도 북미산은 2개월, 아프리카산은 1개월 반이 걸립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아·태 역내에서 풀리는 스폿 물량을 산다면 실시간으로 가격이 폭등해 기존 중동산 대비 수십퍼센트(%)는 높게 지불해야 합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 조짐이 나타나고 국제유가가 폭등하며 정유사들이 초비상에 걸렸다. 지난달 구매한 3월 도착분 원유는 확보됐지만 당장 4월 도착분 원유부터 확보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중동산 원유 수입 의존도가 70%에 달하는데, 발빠른 대체 원유 확보가 쉽지 않아 결국은 비축유 방출이 단기적인 해결책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사태 장기화 고려, 6월 상황까지 시뮬레이션 중”


10일 업계에 따르면 현재 주요 정유사는 유관 부서에서 이번 중동 사태 여파에 따라 당장 4월 도착분 원유뿐만 아니라 5~6월 들여와야 할 원유 재고 확보 방안까지 감안한 사업계획을 검토 중이다. 전쟁 장기화 조짐에 따라 상반기 내내 타격 받을 상황을 전제해 원유 수급과 재고, 공장 가동률 조정 등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4월분 확보 방안 외에도 사태 장기화를 고려해 6월 상황까지 시뮬레이션 중”이라고 말했다. 각 업체는 이미 사태 대응을 위한 태스크포스(TF)와 트레이딩 부서 등 유관부서를 통해 24시간 내내 관련 상황을 모니터링 중이다.

특히 지금 같은 추세가 이어지며 물량 확보에 차질이 생기면, 다음달 설비 가동률 조정이 현실화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당장 유가 급등으로 인한 제품가격 강세에 단기 수익성이 나아진다고 웃을 일이 아니란 것이다. 현재까지는 정유 4사 모두 가동률에 변화가 없지만, 최악의 상황에는 정제설비 가동 자체가 불가능한 초유의 셧다운 사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엘세군도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최대 석유 처리 시설 중 하나인 셰브론 정유 공장에서 정제된 석유 제품을 실은 유조 트럭이 이동하고 있다. [AP]


대체 원유 확보, 가격·기간·설비 등 제약


정유사 입장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동 물량 대체가 수송 기간, 가격 부담, 실제 투입 등 여러 측면에서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국내 원유 수입량의 71%가 중동산이다. 아메리카산은 23%, 아시아는 4%, 아프리카는 2%에 그쳤다.

우선 대체선을 확보해도 긴 운송 기간 때문에 도입 공백이 생길 수 있다. 업계에 따르면 중동산 원유 수송은 보통 2~3주 걸리는데, 북미와 아프리카산 원유의 경우 한 달 반에서 길게는 두 달가량 걸린다. 이에 상대적으로 운송 기간이 짧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역내에서 호주, 동남아 등의 스폿 물량을 구입할 경우, 장기계약과 비교해 20% 이상 높은 가격을 내야 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나선 가운데 2일(현지시간) 항해 차질로 인해 상선들이 아랍에미리트 연안에 정박해 있다. [게티이미지]


아울러 원유 확보 경쟁이 심화하며 조달 비용까지 치솟고 있다. 원유 운임 지표인 발틱원유유조선지수(BDTI)는 이란 공습 직전인 지난달 27일 1991포인트에서 지난 5일 3083포인트로 약 55% 상승하는 등 해상 운임도 급등했다.

무엇보다 현재 국내 정제 시설은 중질유 중심인데, 대체 원유는 경질유가 많다. 원유 종류에 따라 정유 설비 운용 효율과 제품 수율이 달라지는데, 기존 공정에 맞지 않는 원유를 대량 도입하면 공정 운영에 부담이 간다. 이에 경질유를 실제 투입하려면 설비 조정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중동 주요 산유국의 생산 감소와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주요 수입국의 대체 원유 확보 경쟁이 본격화되면 원유 가격은 더 치솟을 전망이다.

“비축유도 임시방편, 무용지물될 수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유업계는 발빠른 비축유 방출이 최우선 대책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 국내 석유 비축 물량은 정부와 민간을 합쳐 약 2억배럴 수준이다. 한국석유공사의 전략비축 약 1억배럴과 민간 정유사의 의무비축분 9500만배럴을 합한 수준으로, 1일 순수입량 대비 약 210일 사용할 수 있는 물량이다. 국가자원안보법 제28조에 따르면 산업통상부장관은 자원안보위기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현저한 우려가 있는 경우 핵심자원의 수급 및 가격 안정을 위해 비축의무기관의 장에게 비축된 핵심자원을 방출·사용하게 할 수 있다.

정부는 최근 중동 정세 불안이 이어지며 위기 단계별 비축유 세부 방출 계획을 수립해 수급 위기 악화 시 즉시 방출할 수 있게 준비 중이다.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민간 보유분에 대해서도 각사와 긴밀히 협의히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민·관 모두 실기하지 않아야 위기를 넘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9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중동상황대응본부 회의에서 정유업계 관계자들이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


다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비축유 방출도 결국은 단기적인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최악의 에너지 위기가 현실화될 수 공포가 커지는 가운데,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2023년 기준 석유·가스 등 1차 에너지원 수입 의존도 93.9%) 입장에선 중동 긴장 완화만이 살 길이란 분위기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가 들여오는 원유 70%가 중동산이고 대부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데 발이 묶인 것”이라며 “대체 원유 확보가 실질적으로 어려워 정부 비축유 방출은 당장의 최우선이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이 또한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고 토로했다.

30년만에 최고가격제 부활…정유사들 ‘설상가상’


여기에 30년 만에 ‘석유 최고가격 지정제’가 부활하며 정유업계는 당장 부담이 더 커질 전망이다. 정부는 기름값을 잡기 위해 이번 주 중 석유최고가격제를 전격 시행한다. 국제 시세에 일정 마진을 더해 정유사의 공급가 상한선을 정하는 방식이 유력하게 검토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1997년 유가 자유화 조치 이후 정부가 시장 가격에 직접 개입하는 첫 사례가 될 전망이다.

특히 정부가 주유소 판매가가 아닌 정유사 공급가를 겨냥하며, 사실상 정유사 입장에선 ‘팔수록 손해 보는’ 상황이 된다. 향후 정부가 정유업계 손실 보전을 위해 재정을 투입할 시 이에 대한 논란도 불거질 수 있다. 인위적 가격 통제 대신 유류세 인하 등 대응책이 필요하단 분석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단기간 물가 안정 등 가시적 효과는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ㄴ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