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거래처 요구에 늘어난 작업량
AI 활용 작업은 ‘유령 노동’ 취급
![]() |
| 디자이너 이모 씨가 AI로 작업하는 모습 [독자 제공] |
[헤럴드경제=전새날 기자] “그거 그냥 딸깍이면 되는 거 아니에요?”
프리랜서 디자이너 이모 씨는 최근 계약 업체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인공지능(AI)을 이용하면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쉽게 결과물을 완성할 수 있지 않냐는 취지의 얘기였다.
하지만 이씨의 체감은 전혀 다르다. AI를 활용해 시안을 만드는 과정부터 수정·보완 작업까지 오히려 손이 더 많이 가기 때문이다. 그는 “속도는 빨라졌지만 요구되는 작업량과 수정 횟수는 더 늘었다”며 “차라리 예전이 나을 때도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네 센터에서 열린 스노우플레이크 서밋 2025에서 연설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 |
최근 몇 년 사이 AI 디자인 도구를 홍보하는 영상과 사용법이 빠르게 확산했다. 짧은 시간 안에 고품질의 이미지가 완성되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디자인 작업 전반이 쉬워졌다는 인식도 함께 퍼졌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현실은 정반대다.
이씨는 “영상만 보면 결과물이 굉장히 완성도 높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무에 바로 쓸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인쇄 적합성이나 매체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 이미지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디자이너들은 이를 걸러내고 보완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거래처는 이 과정을 체감하기 어렵다. 그는 “이미지만 보고 ‘디자인이 쉬워졌다’고 생각한다”며 “작업을 맡길 때도 ‘그거 쉽게 되던데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AI 도입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작업 범위다. 과거에는 일러스트를 제작해 납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최근에는 그 결과물을 기반으로 영상 제작이나 3D화 작업 등을 더불어 요구받는 경우가 늘었다. 과거엔 서로 다른 영역의 과업으로 여겨지던 것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발주하는 것. 이씨는 “예전에는 포스터만 만들면 됐지만 요즘은 기본적으로 움직이게 해달라는 요청이 많다”며 “로고를 만들면 입체 버전이나 모션(움직임)까지 요구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조건은 늘었지만 보수 수준은 그대로다. 이씨는 “모션을 할 줄 몰라도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 배우겠다’는 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며 “결국 공부와 외주를 동시에 진행하는 구조가 된다”고 설명했다.
영상 편집을 하는 프리랜서 임모 씨 역시 “AI로 다 된다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했다. 그는 “촬영과 편집은 원래 완전히 다른 영역인데 요즘은 AI로 영상도 만들 수 있으니 편집 단계에서 같이 해결해달라는 요구가 많아졌다”며 “기존에는 맡지 않던 촬영 성격의 작업까지 편집자가 떠안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AI 확산 이후 신입이나 경력이 짧은 작업자들은 더 큰 어려움을 호소한다. 프리랜서에게 포트폴리오는 곧 경력이다. 작업물을 쌓아둬야 더 큰 고객으로부터 더 후하게 보수를 쳐주는 일감을 따낼 수 있다. 하지만 AI 툴이 퍼지면서 이 경로 자체가 좁아졌다. 일감은 줄어든 반면 작업물의 품질 기준은 더 높아졌고 양도 많아졌다. 과거엔 경력이 짧은 디자이너들에게 떨어지던 시안 제작 같은 기초 작업은 이제 AI가 대체한다.
자연스럽게 경쟁이 치열해졌다. 프리랜서들은 발주처의 더 많은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무리한 수정 요청이나 추가 작업은 웃는 얼굴로 받아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낙인만 찍힌다.
![]() |
| AI도입 전후 업무 변화 |
이처럼 AI는 작업 초기 단계에서 시안을 빠르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지만 전체 노동량을 줄이지는 않는다는 하소연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오히려 결과물의 개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또다른 프리랜서 디자이너 최모 씨는 “예전에는 하나의 방향을 잡고 그걸 다듬어가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AI가 만든 여러 결과물 중에서 쓸 수 있는 것을 다시 골라내는 일이 먼저 생긴다”며 “결국 만드는 일이 줄어든 게 아니라 판단하고 버리는 시간이 늘어난 셈”이라고 말했다.
작업 시간도 달라졌다. 단순히 기간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여유까지 모조리 사라졌다. 과거에는 일정에 맞춰 문서 형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거래처가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보내며 수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씨는 “하나의 작업을 단계적으로 마무리하기보다 끝없는 피드백 지옥에 갇히는 느낌”이라며 “우리는 근무 시간 기준이 아니라 프로젝트 하나당, 작업 한건당 돈을 받는데 같은 건수를 맡아도 체감 노동량은 훨씬 많아졌다”고 털어놨다.
이 과정에서 프리랜서의 작업물이 동의 없이 AI에 활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중간 시안을 기반으로 AI를 거친 수정안을 제시하는 식이다. 저작권 문제로 번질 수 있지만 이를 문제 삼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직접 그린 만화를 연재하는 오모 씨는 “광고주가 내가 만든 캐릭터를 AI로 마음대로 변형해 수정을 요구하기도 한다”며 “왜 문제인지를 설명하는 순간 다시는 협업할 수 없게 될까봐 그냥 넘어간다”고 말했다.
변화는 개인의 체감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AI 도입 이후 업무 시간이 늘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의 인력 분석 기업 액티브트랙 생산성 연구소가 발간한 ‘2026 직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1만584명의 AI 도입 전후 180일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거의 모든 업무 영역에서 소요 시간이 27%에서 최대 346%까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메일 처리 시간(104%), 채팅·메시징(145%), 업무관리 도구 사용 시간(94%) 등이 모두 증가했다. 반복 업무를 줄일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소통과 관리 업무가 늘어난 것이다. 이는 프리랜서들이 호소하는 끝없는 피드백과 작업 범위 확대 현상과도 맞닿아있다.
![]() |
| 지난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서울시 일자리 박람회’에서 한 구직자가 AI 일자리 교육 관련 홍보물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 |
AI 도입 이후 프리랜서 노동 환경의 변화는 다양한 직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웹툰·웹소설 등 콘텐츠 산업에서는 창작자가 만든 결과물이 AI 학습 데이터로 활용되면서 이후에는 유사한 결과물이 대량으로 생산된다. 이 과정에서 창작자는 단순히 경쟁자가 늘어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작업물과 다시 경쟁을 만드는 구조에 놓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개별 작업자의 단가는 낮아지고 더 많은 작업을 해야만 수익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웹툰 작가 정모 씨는 “AI를 통해 2차, 3차로 가공돼 완성된 작업물은 원 저작자가 누군지 찾기도 어렵다”며 “내 작업물이 AI를 통해 표절돼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아이디어를 쏟아부어 만든 작업물의 가치가 한순간에 떨어지게 된다”며 “비슷한 작업물이 많아지면 결국 더 저렴한 작업자에게 일을 맡기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프리랜서가 종사하는 플랫폼 노동에서도 서서히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박현준 프리랜서 권익센터장은 “배달·대리운전과 같은 직군에서는 AI 기반 알고리즘이 배차와 업무를 배분하면서 쉬는 시간 없이 일을 이어가도록 설계되는 경향이 나타난다”며 “물류센터나 콜센터 역시 AI 도입 이후 단순 업무는 빠르게 자동화되는 반면 남은 업무는 더욱 압축되면서 노동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센터장은 “AI는 쉬지 않는다. 효율성이 높아졌다는 것은 일이 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속도가 빨라졌다는 뜻”이라며 “일을 맡겨놓고 쉬는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력을 더 쥐어짜는 방식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AI가 가는 속도에 맞춰 사람도 이전보다 더 빠르게 대응해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체감 수준을 넘어 노동의 성격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AI는 일자리를 줄이는 대체 효과와 동시에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를 함께 가져온다”며 “문제는 생산성이 높아진 만큼 보상이 따라오지 않을 때 노동 강도만 높아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특히 AI를 활용한 프리랜서들의 작업이 노동으로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현상에 주목했다. 그는 “AI를 사용하는 작업이 마치 노동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며 “이를 ‘유령 노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AI가 일을 보조하거나 일부를 대신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더 많은 작업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AI 시대에는 인간의 노동과 기술의 역할을 어디까지 구분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불가피하다”며 “유급 노동의 기준 역시 사회적 논의를 통해 다시 정립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