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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후원인의 밤’ 출연료 전액을 “신진 음악가들을 위한 무대에 써달라”며 기부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예술후원인의 밤’이 시작된 2024년,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대망의 첫 무대를 꾸민 뒤 출연료 전액을 기부했다. 그는 이날 “무대 진출이 어려운 신진 음악가에게 무대를 만들어주고 관객과 소통할 기회를 제공하는데 써달라”며 마음을 전했다. 선배가 나서니 후배도 동참했다. 다음 타자는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지난해 그 역시 출연료 전액을 기부하며 ‘선순환의 환류 모델’을 이어갔다.
‘영재’로 불리던 시절부터 두 사람은 금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으며 ‘음악의 꿈’을 키웠다. ‘우리가 받은 도움을 이제 돌려줄 때’라는 두 피아니스트의 마음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라운지콘서트’라는 무대로 이어졌다. 총 8회에 걸쳐 진행되는 이 무대는 ‘별의 서곡’이라는 부제처럼 ‘이제 막 빛을 내기 시작한 젊은 음악가들이 내일의 별로 탄생하는 순간’을 관객과 함께 그려낸다. 티켓 수익 전액이 다시 신진예술가 지원금으로 돌아가는 선순환 구조다.
이날 무대에 합류한 피아노 전공 연주자는 “클래식 시장은 티켓파워가 있는 스타 연주자들의 공연을 선호하다 보니, 콩쿠르 순위권 안에 들었더라도 데뷔 무대를 갖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며 “이런 자리가 생긴다는 것이 귀하다”고 말했다.
아직 반짝이지 못한 연주자들을 향한 ‘내리사랑’ 서사는 예술 후원이 자금 지원을 넘어, 한 예술가의 삶을 바꾸고 생태계 전체에 온기를 불어넣는 행위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 후원의 필요성이 커지는 이유다.
사실 국내 예술계는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민간 후원 비율은 고작 3% 미만일 정도로 공공 재원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다 보니 활동의 지속가능을 담보할 수 있는 예술인들의 수입 수준도 낮은 편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예산 집행 방향에 따라 창작의 지속가능성이 흔들릴 수 있는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2024년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예술인 1인당 평균 연 소득은 1055만원. 같은 기간 전체 평균(2554만원)의 41.3%에 불과하다. 음악 901만원, 무용 802만원, 미술 603만원, 문학 454만원 등 대부분의 장르에서 연 소득이 1000만원을 넘지 못했다. 예술인 2명 중 1명은 부업을 하고 있으며, 23%는 예술 경력이 1년 이상 단절된 경험이 있었다.
이제승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후원센터장은 “예술은 단순히 지원이 필요한 분야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가치를 환원하는 공공적 자산”이라며 “특정 재원에만 의존하기보다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예술의 가치를 지지하는 구조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나무(ARTISTREE) 플랫폼이다. 예술나무는 민간 후원 확대를 위해 만든 모금 브랜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술나무 한 그루를 키운다”는 의미를 담아 시작된 이 캠페인은 지난 13년간 파편화되어 있던 예술 후원을 하나의 통합 브랜드로 묶었다. 2012년 예술의 ‘가치 옹호’ 선언과 함께 출발, 2020년대 들어 모금함을 넘어 ‘후원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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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형 문화예술 축제’인 아트포레스트페스티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예술나무는 후원 목적에 따라 사용처를 연동하는 ‘명분 중심’의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타깃형 후원자 개발 전략을 짰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2023년 시작된 ‘기부형 문화예술 축제’인 아트포레스트페스티벌은 ‘후원 경험의 대중화’의 닻을 올린 시도다. 2024년 행사엔 무려 9000명이 찾았다. 이 축제는 ‘놀이가 기부가 되는 경험’을 갖는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 센터장은 “지금까진 예술 향유가 후원보다 더 시급한 과제였지만, 미래세대는 향유를 넘어 좋아하는 예술을 후원하는 세대가 될 것”이라며 “‘문화예술축제’ 형식을 빌려 대중에게 다가감으로써, 기부를 어려운 의무가 아닌 즐거운 문화 참여로 인식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축제 현장에서 ‘굿즈’를 통해 소액 기부라는 ‘첫 경험’을 하게 해 잠재적 후원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페스티벌 수익금 전액은 2024년 7월 재개관한 아르코꿈밭극장(구 학전소극장) 운영과 연극내일기금에 사용된다.
‘연극내일기금’은 세대 간 순환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다. 원로배우 신구와 박근형은 지난해 5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수익을 전액 기부하며 이 기금을 조성했다. 그들은 “후배 청년 배우들에게 제대로 된 훈련 기회를 주고 싶다”는 바람에서 참여했다.
두 배우의 기부를 마중물 삼아 태어난 ‘연극내일 프로젝트’는 만 24세 이상 39세 이하 청년·신진 연극배우 30명을 선발해 진행하는 합숙형 연극캠프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오세혁, 김정, 강훈구 연출가가 주축이 된 ‘프로젝트 3일’의 청년 연출가·작가·프로듀서들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다는 점이다. 선배의 기부와 청년 예술인의 기획이 만나 ‘세대가 함께 다음 무대를 준비하는’ 새로운 모델을 구축한 셈이다. 워크숍, 배우 훈련, 마스터클래스 등을 진행했고, 오는 24~25일 아르코꿈밭극장에선 쇼케이스 공연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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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배우 신구와 박근형의 기부를 마중물 삼아 태어난 ‘연극내일 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선배 배우들의 지원은 문화예술계를 넘어 팬덤으로 확장됐다. 무용수 최호종이 지난해 ‘젊은 예술가상’ 수상으로 받은 포상금 전액을 어린이·청소년의 기초예술 경험 확대를 위한 ‘예술나무 꿈밭펀딩’에 기부하자, 그의 팬들이 스타를 따라 ‘기부 행렬’에 동참했다. 크로스오버 그룹 리베란테와 멤버 김지훈, 가수 헨리, 그룹 라이즈의 쇼타로 팬클럽 등의 후원도 의미 있는 성과다.
고액 후원과 교류형 후원을 아우르는 케이아츠펀드는 예술후원인의 밤과 라운지클럽을 통해 운영된다. 손열음, 선우예권 같은 스타 예술가의 재능 기부와 미술품 경매 등이 대표적이다.
예술가와 문화예술 관련 명사, 후원인 사이의 교감은 멤버십 소속감을 높인다. 문예위에 따르면, 2024년 라운지클럽엔 40명이 504만원을 후원했다. 2025년엔 후원자 수는 10명으로 줄었지만 후원금은 685만원으로 오히려 늘었다. 기부의 ‘양’보다 ‘질’적 성장이 이뤄진 것. 이에 문예위는 올해부터 ‘예술후원인의 밤’을 통해 아르코아츠소사이어티를 만들고, 고액 후원인들의 멤버십을 강화하고 있다. 혜택 제공을 넘어 후원자가 자신의 기부가 가져온 사회적 변화를 체감하고 특별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느끼도록 설계했다.
프로그램들이 단발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후원 효능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낸 기부금이 누구의 어떤 무대를 만들었는지 투명하게 확인될 때 후원은 지속된다. 문예위는 이를 위해 ‘선순환 임팩트’의 가시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 센터장은 “‘예술나무’ 브랜드는 ‘추상적인 선의를 구체적인 경험으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플랫폼”이라며 “한국 사회에서 예술기부가 누구나 일상에서 쉽고 자랑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로 정착하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