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이 빠져, 죽어도 되니까”…임윤찬의 위험한 음악 서사 [고승희의 리와인드]

6, 12일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의 심연
불완전과 반복, 붕괴와 황홀경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으로 돌아온 임윤찬의 리사이틀 [목 프로덕션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0개의 손가락은 시간을 건너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오갔다. 죽음을 예감하고도 눈부시게 거대한 소나타를 남긴 슈베르트,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황홀경을 꿈꾼 스크랴빈. 그 사이에서 피아니스트는 ‘몰락하는 자아’를 길어 올렸다. 내면의 아주 깊은 곳을 향해 두려움 없이, 기꺼이 뛰어들었다. K-팝 노랫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더 깊이 빠져, 죽어도 되니까.” (우즈 ‘드로우닝’)

스물두 살의 피아니스트가 빠져든 것은 음악이었다. 이성의 끈을 단단히 붙잡아 빈곤한 허상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내버릴 준비를 이미 마친 것처럼 자신을 내맡겼다.

이번엔 ‘사유’였다. 임윤찬은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을 꺼내며 소용돌이치는 가슴 안에 쌓아온 음악과 예술가의 사유를 꺼내놓았다. 리사이틀은 지난 3월 홍콩을 시작으로 일본 4개 도시(도쿄, 오사카, 나고야, 가와사키)를 거쳐 6일 롯데콘서트홀부터 이어지는 일정이다.

사실 프로그램은 공연을 앞두고 달라졌다. 임윤찬이 직접 정한 프로그램이다. 그는 “긴 침묵과 망설임의 시간을 지나 이제야 비로소 내면 깊이에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음악에 다다르게 됐다”며 “그동안 저를 묶어두었던 강박과 관성, 몸에 밴 습관들을 모두 내려놓고, 오랜 세월 사랑해 왔으며 동시에 결코 외면하고 싶지 않았던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의 작품으로 프로그램을 다시 엮었다”고 했다. 자기 내면을 정직하게 마주한 한 피아니스트의 숙고였다.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으로 돌아온 임윤찬의 리사이틀 [목 프로덕션 제공]


임윤찬은 어떤 곡도 그저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아니다. 그는 매 공연마다 자기만의 언어로 음악을 새로 쓴다. 이번 리사이틀은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이라는 두 세계를 가로지르는 여정이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 ‘가슈타이너’와 스크랴빈 소나타 2·3·4번은 서로 다른 시대의 곡이다. 그는 고전과 낭만의 경계에 서 있던 슈베르트와 후기 낭만에서 현대적 신비주의로 이행하던 스크랴빈을 이어서 배치했다. 이 길 위에서 임윤찬의 손은 인간의 심연 너머로 향했다.

각기 다른 프로그램이었으나, 두 작곡가의 음악은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직조됐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의 1악장은 지나칠 만큼 화사하고, 속도도 빨랐다.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응축된 에너지를 뿜어낸 임윤찬은 2분의 2박자의 추진력을 잃지 않았다. 리드미컬한 도약과 그 사이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루바토는 임윤찬의 장기였다. 작은 등 뒤로 왼손과 오른손이 점, 점, 점을 그리며 한 번씩 튀어 오를 때마다 음악엔 생동감이 더해졌다.

2악장에 접어들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A 장조의 성스러운 흐름은 달뜬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 앉히는 위로의 주문이었다. 영혼의 지도를 어루만지는 선율이 이어지다 맺고 끊으며 밀고 당기는 손길에 음악은 시각적 이미지로 치환됐다. 선명하진 않지만, 이미 거쳐온 기억의 편린들을 종소리처럼 떠오르게 했다. 교향곡처럼 연주하던 1악장과 달리 2악장에선 가곡을 노래하듯, 멜로디를 읊조렸다. 섬세하고 다정한 위로에 빼앗긴 마음을 찾아올 새도 없이 음악은 스케르초로 내달렸다. 헤미올라(3박을 2처럼, 혹은 2박을 3처럼 연주) 리듬이 재기발랄하게 튀어 올랐다. 슈베르트의 리듬 강박이 3악장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임윤찬은 그 모든 순간마다 물러서지 않고 모든 음표를 낚아챘다.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으로 돌아온 임윤찬의 리사이틀 [목 프로덕션 제공]


비틀거리듯 반복되는 셋잇단음표는 임윤찬의 손끝에서 생기의 몸짓이 됐다. 4악장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맑고 투명한 소리 사이로 정교한 감각이 건반 위를 움직였다. 그러다 활력 안에 숨어든 ‘붕괴의 비애’를 손끝으로 움켜지며 서사를 완성했다.

이 곡엔 고전의 소나타 형식미라는 외피에 서사적 자유로움을 품은 광기 어린 에너지가 내부에 스며있다. 임윤찬의 음악은 아름답지만, 불길한 우울을 품었다. 중독적으로 반복되는 음표들을 더 부각해 슈베르트의 형식미를 집착과 강박, 심지어 환각으로 들려줬다.

그의 스크랴빈은 ‘모호성’을 벗고 선명함을 드러냈다. 소나타 2, 3, 4번이 연이어 연주되자 세 곡은 마치 장대한 서사로 전환됐다.

임윤찬이 스크랴빈의 모호함을 다루는 방식은 특히 흥미로웠다. 스크랴빈의 음악은 화성은 미끄러지고, 조성의 중심은 흔들리며, 선율과 배경의 경계는 흐려진다. 안개 자욱한 몽환적인 풍경이 떠오르나, 임윤찬은 단단히 구조를 잡고 혁명가처럼 투쟁했다. 색채로의 음악이 아닌, 거대한 서사로의 음악이었다.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으로 돌아온 임윤찬의 리사이틀 [목 프로덕션 제공]


각각의 소나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2번에서 시작된 바다의 움직1임은 3번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침잠했고, 4번에서는 마침내 물질의 경계를 벗어나 빛과 황홀경으로 비상했다. 음악은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긴 호흡으로 이어졌다.

소나타 2번은 스크랴빈에게서 만나는 쇼팽의 녹턴적 서정성과 바다의 이미지를 결합한 ‘인상주의적 낭만주의’의 정점이다. 바다와 달빛, 밤의 공기와 물결의 움직임 같은 자연의 이미지가 살아 있다. 임윤찬은 음표들을 예쁘게 흩뿌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 고음은 빛의 입자처럼 부서졌고, 왼손의 셋잇단음표는 깊은 바다 아래에서 움직이는 조류처럼 출렁였다. 소리는 투명했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를 향해 밀려가는 단단한 힘이 자리했다.

그러다 소나타 3번에 들어서자, 음악은 또 다른 낯빛을 띠었다. 스크랴빈은 이 곡에 ‘심연의 투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화음이 불안정한 자아의 내면을 보여줬다. 이리 저리 치이고 미끄러졌고, 중심을 잡으려 해도 흔들렸다. 그것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라고 임윤찬은 이야기했다. 그는 화성이 흔들리는 순간들을 매끄럽게 마무리하지 않았다. 도리어 조성의 균열과 불안정한 움직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슈베르트와 스크랴빈으로 돌아온 임윤찬의 리사이틀. 고승희 기자


임윤찬은 완벽하게 봉합된 음악보다 균열과 흔들림 속에서 살아있는 음악을 택했다. 내면을 덮쳐온 파도는 끝내 욕망과 광기, 자기 붕괴의 심연으로 번져갔다. 극단적인 다이내믹, 거침없이 몰아치는 속도, 파괴 직전까지 에너지를 쏟아내는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나의 음악에 안전한 해석은 없다는 또 한 번의 시그널이었다. 무너질지언정 끝내 자신의 음악 언어를 현실로 끌어내겠다는 의지였다. 물론 그는 무너지지도 않았다.

스크랴빈의 4번은 별빛과 비상의 음악이다. 그는 건반을 치기보다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음을 만들었다. 피아노는 허공에서 소리를 끌어내는 것처럼 들렸다. 점차 빨라지고 밝아지는 음형들은 일제히 하나의 빛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날의 리사이틀은 변형의 서사였다. 슈베르트가 던진 인간의 불안과 생명력은 스크랴빈을 지나며 내면의 심연과 황홀경으로 나아갔다.임윤찬이 써내려간 확신의 언어는 위험하고 대범했다. 그의 연주는 기교를 넘어 구조로, 구조를 넘어 사유로, 사유를 넘어 다시 인간의, 혹은 자신의 음악적 경계를 해체하는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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