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저주’가 부른 환율 대란…비슷한 처지 대만은 어떻게 피했나 [홍길용의 화식열전](897)

올해 환 변동, 대만 0.28% vs. 한국 8.3%

올해 코스피는 93.65% 올랐다. 그런데 외국인은 팔았다. 5일까지 누적 순매도액은 142조원이다. 평균 환율을 적용하면 약 1000억달러에 이른다. 같은 기간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8.3% 하락했다.

대만도 비슷했다. 올해 대만 가권지수는 77.62% 올랐다. 역시 외국인은 약 680억 달러어치(한화 100조원 이상) 대만 주식을 순매도했다. 그런데 달러 대비 대만달러 가치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달러/대만달러 환율 변동률은 0.28%에 그쳤다.

한국과 대만은 올해 가장 닮은 시장이다. 둘 다 AI 반도체 랠리의 최대 수혜국이다. 주가가 급등했고, 외국인이 포트폴리오 리밸런싱(주가 상승에 따라 늘어난 비중의 조정) 차원에서 대규모 차익실현을 하는, 즉 ‘성공의 저주(Curse of Success)’를 겪고 있다. 환율 반응이 완전히 다른 점이 눈길을 끈다. 한국에서는 원화가 크게 흔들렸지만, 대만달러가 버텼다. 외국인 매도, 즉 달러 수요를 받아내는 시스템의 방어력 때문이다.

외환시장 달러 유동성 부족, 환율 급등 유발

한국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일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국이다. 올 들어 5월(예상 포함)까지 경상수지 누적흑자는 1400억달러 안팎으로 추정된다. 반도체 수출은 강하고, 코스피 시가총액은 세계 6위권까지 올라섰다. 위기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달러가 없는 게 아니라 제때 시장에 공급되지 않았던 데 있다.

올해 외국인 순매도액 142조원은 환율을 감안하면 1000억 달러 규모다. 웬만한 국가의 외환보유액에 맞먹는다. 내국인의 해외투자도 계속 늘고 있다. 국민연금은 해외자산 비중을 높이고, 개인은 미국 주식과 ETF를 산다. 달러 수요다. 기업들은 수출로 번 달러를 빠르게 원화로 바꾸지 않는다. 달러를 벌어오는 힘은 강하지만, 달러가 시장에 공급되는 속도가 느려 늘어난 달러 수요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대만, 달러 수요 공급 조절장치 잘 갖춰

대만은 다르다. 외국인 순매도에도 환율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충격을 흡수하는 여러 장치들 덕분이다.

첫째, 외환보유액이다. 대만의 외환보유액은 6000억 달러를 넘는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는 작지만 외환보유액은 더 많다. 대만은 미국과 일본처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상설 통화스와프를 맺기 어렵다. 정식 외교관계라는 제약도 있다. 그래서 대만은 달러 신용망 대신 달러 저수지를 크게 만들었다. 지난 15년간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 4000억 달러 대에서 머물 때 대만은 외화 곳간을 2배로 늘렸다.

둘째, 경상수지 흑자의 힘이다. 대만은 경제 규모 대비 경상흑자가 압도적으로 크다. 반도체 수출에서 벌어들인 달러가 꾸준히 들어온다. 대만 수출 기업들은 환율이 불안할 때 달러를 시장에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벌어들인 달러를 환전하기 주저한다. 환율도 불안하고 금리도 미국 보다 낮으니 굳이 환전을 할 이유가 적다.

셋째, 해외투자 환 헤지 구조다. 대만도 보험사 등 금융회사들의 해외투자가 활발하다. 환 헤지 비율이 높아 외환시장에서 일방적인 달러 수요를 덜 만든다. 우리나라는 환 헤지를 하지 않는 해외투자가 많다. 해외투자에서는 환 헤지를 하지 않는 것도 전략이다. 다만 큰 덩어리의 해외투자가 외환시장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헤지의 필요성이 커진다. 투자한 돈을 회수할 때 환 변동성 노출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다.

넷째, 외환시장의 깊이다. 한국과 대만 모두 글로벌 시장에서 거래되는 통화가 아니다. 다만 한국은 은행 중심의 좁은 외환시장인데 반해 대만은 은행 외에 다양한 금융회사와 투자 기관들이 시장에 참여한다. 수요가 다양해 거래가 깊어질 수 있다.

* 챗GPT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이미지입니다.


환율, 금리 증시 수준에도 영향…대만 신흥시장 1위

환율은 금리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원화 약세는 수입물가를 높인다. 중동 사태로 석유 관련 제품 가격이 오르는 상황에서 환율까지 상승하면 인플레이션 압력은 더 커진다. 올해 실질경제성장률 전망은 대만 7%대, 한국 3%대인데,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대만 1.7%, 한국 4.2%다. 경제 성장에는 저금리가 유리하다.

낮은 금리는 증시 밸류이에션도 높인다. 12개월 선행 기준으로 주가수익비율(PER)은 한국이 8~9배, 대만이 18~22배다. 한국의 반도체 랠리는 지난 해 하반기부터지만, 대만TSMC 주가는 이보다 먼저 움직였다. 외국인들의 리밸런싱 매도가 먼저 나타났다는 뜻이다. 대만의 국내 자금은 이를 잘 받아냈다. 대만은 가계자산의 20%가 시장성증권이고, 30%가 예금이다. 부동산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한국은 가계자산의 75% 이상이 부동산 등 실물자산이다. 예금 비중이 20%가량이고 시장성 증권 비중은 고작 6%가 채 안된다.

증시의 깊이도 대만이 한수 위다. 5월 기준 MSCI신흥지수내 국가별 비중은 대만이 25~26%로 1위, 한국이 21~22%로 2위다. 3~4%포인트 이상의 차이가 난다. 이유는 MSCI 국가별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이 아니라 유동주식 조정 시가총액(free float-adjusted market capitalization)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대주주나 국가 지분을 제외한 실제 시장에서 유통되는 주식(대형·중형주의 약 85%를 포착) 기준이다. 그냥 시가총액은 한국과 대만이 약 5조 달러로 비슷하지만, MSCI 기준은 대만이 3.36조 달러로 한국(2.95조) 보다 크다. MSCI 기준은 영국(3.21조)과 캐나다(3.12조)도 우리보다 더 크다.

‘잘 사는 나라 되려면’ 자본·외환시장 선진화 필수

AI 투자가 만들어준 반도체 초호황으로 관련된 우리나라 기업들의 이익이 크게 늘고 주가도 급등했다. 상법 개정 등으로 일반주주 소외 우려도 상당부분 해소됐다. 하지만 자본시장과 외환시장의 수준은 우리 경제의 달라진 모습과 아직 어울리지 않는다. 규제 중심의 20세기 인식 틀에 갇혀 있다.

선진국은 자본이 축적된 나라다. 자본을 잘 굴리면 근로를 뛰어넘는 성과가 가능하다. 세계 6위 증시와 세계 2위권 경상흑자를 자랑하는 나라의 자본·외환시장이 낙후돼 있으면 자본 효율에 치명적이다.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도 외면하기 쉽다. ‘성공의 저주’는 그렇게 반복된다.

결국 문제는 좋은 기업이 아니라 좋은 시장이다. 홍콩과 도쿄는 자국 기업만 거래하는 시장이 아니다. 세계의 자본이 스스로 찾아오는 시장이다. 그 시장에서는 ‘성공의 저주’가 아니라 ‘성공의 선순환’이 작동한다. 코스피 1만 시대 안착을 바란다면 뉴욕은 당장 넘볼 수 없어도, 홍콩과 도쿄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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