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 펑펑 울렸다…‘코 깨진’ 스핑크스와 헐벗은 노인, 美서 무슨 일이[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엘리후 베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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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스핑크스의 교훈
엘리후 베더, ‘스핑크스의 질문자’(일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알려주십시오. 제발….”

헐벗은 노인이 스핑크스에 귀를 댄 채 애원하고 있다. 지팡이까지 내던진 그는 이 존재가 입을 열 때까지 꼼짝하지 않을 모습이다. 이곳은 버려진 땅이다. 별 하나 볼 수 없는 밤하늘, 제멋대로 나뒹구는 돌은 스산함을 더한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백골에도 비극적 사연만 가득할 듯하다. 이곳에도 원래는 문명이 있었다. 저 멀리 언덕으로 이어지고 있는 건 분명 길이다. 주변에 깊이 파묻힌 건 잘 닦인 기둥이다. 사람들은 이 길 위에서 마주하고, 이 기둥이 받치는 지붕 밑에서 잠을 잤을 것이다. 그랬던 세상은 어쩌다 이렇게 변했을까. 그 원흉은 전쟁과 전염병일 수 있다. 천재지변이나 대형 재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인간의 미숙함이 지금의 상황을 부추겼을 것임은 확실해보인다.

뭉툭하게 부러진 코, 볼에 난 여러 상처, 모래바람 틈에서 겨우 내민 얼굴….

억겁의 세월을 고스란히 품은 스핑크스는 기원전 25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자의 대(大) 스핑크스를 떠올리게 한다. 지난 수천 년간 수많은 문명의 흥망성쇠를 봤을 듯한 이 스핑크스는, 끝내 황폐해져버린 직전 제국의 시작과 끝 또한 지켜봤을 것이다.

엘리후 베더, ‘Prayer for Death in the Desert’

그렇다면 대재앙 속 최후의 생존자 같은 노인은 스핑크스에 어떤 질문을 했을까.

신화 속에서 스핑크스는 수수께끼를 달고 사는 반인반수 괴물로 등장한다. 나그네의 앞을 막은 채 아리송한 문제를 내고, 답을 말하지 못하면 곧장 살점을 뜯어먹는 악마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낯선 이의 침입을 막는 스핑크스 덕에 주변 사람들은 되레 불안 없이 살 수 있었다. 외지인에게 스핑크스는 끔찍한 괴물이었지만, 일대 주민에게 이 생명체는 믿음직한 문지기였다. 이러한 인식에서 조형물로의 스핑크스 또한 제국의 수호신이자 조언자로 상징적 의미를 품었다. “…이토록 황량해진 세상에서, 인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그런 스핑크스에 노인은 이렇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불모지를 바라보는 스핑크스의 얼굴은 근엄하다. 지난 수천 년 간 황야가 왕국이 되고, 재차 황무지가 되고, 다시 제국이 세워지고, 끝내 또 지금의 불모지가 되는 걸 봐온 스핑크스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도 확신하고 있다. “과거의 인간들 또한 한때는 괴로워했었다. 하지만 인류는 어김없이 또다시 문명을 꽃 피웠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스핑크스가 입만 열 수 있었다면 노인에게 이런 말을 건넸을 듯도 하다.

깊은 사색을 이끄는 엘리후 베더(Elihu Vedder·1836~1923)의 ‘스핑크스의 질문자’는 당시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많은 미국인이 이 그림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명에 가까웠던 베더는 ‘스핑크스의 질문자’ 한 점으로 미국이 사랑하는 화가 반열까지 올라섰다. 언뜻 보면 고요하고 적막한, 그래서 무섭기도 한 이 그림은 왜 그 시절 미국인의 심금을 울렸을까.

옛 영광을 꿈꿀 용기
엘리후 베더, ‘Landscape with Sheep and Old Well’

베더가 이 그림을 그린 1863년, 미 대륙에는 피비린내가 들끓고 있었다. 훗날 미 역사상 최악의 내전으로 쓰일 남북전쟁 탓이었다.

미국은 1783년 영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후 독립국으로 눈부신 발전을 일궜다. 우선 덩치부터 키웠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로부터 212만㎢(현 미국 본토 면적의 4분의 1)에 이르는 루이지애나주(州)를 사들였다. 뒤이어 1846~1848년에는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그 나라의 북부 지역을 깡그리 뺏어왔다. 그사이 위상도 높였다. 1812년,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 영국과 전쟁에 나섰다. 역시나 워싱턴 D.C.가 화염에 휩싸이는 등 수모를 겪었지만, 미국은 굴하지 않았다. 끈질긴 게릴라전, 허를 찌르는 저격 작전 등 필사의 저항으로 전쟁을 3년이나 끌었다. 결국 영국을 지치게 해 무승부로 만들었다. 아울러 유럽 국가들을 향해 대놓고 “우리 땅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한 먼로 독트린 선언, 중남미를 향한 군사적 영향력 확대 등 배짱 두둑한 행보를 보였다. 전 세계가 놀랐다. 과거 미국에는 돌무덤과 초원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 유럽 열강(列)의 동네북 취급만 받아왔다. 그랬던 미국이 어느새 이들을 위협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제 그 어떤 나라도 미국을 얕보지 못했다.

엘리후 베더, ‘The Dying Sea Gull’

그런 국가가 얼마 안 돼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것으로 모자라 아예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외부의 적이 물러서자 내부의 해묵은 갈등이 고개를 든 격이었다. 논쟁의 씨앗은 노예제 존속 여부였다. 사실 미 남부와 미 북부는 노예제를 놓고 서로를 오랜 기간 못마땅히 보고 있었다. 면화 재배 등 농업 중심 사회였던 미 남부는 농장에서 노예를 부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사이 제조업을 발전시킨 미 북부에선 종교적, 윤리적 이유 등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이 일고 있었다.

알렉산더 가드너(촬영), 에이브러햄 링컨

이런 가운데 1861년, 노예제 폐지론자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뽑혔다.

미 남부주는 위기감을 느꼈다. 어쩌면 이 흐름을 타고 농장 곳곳에서 반란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일곱 주는 그해 3월 링컨이 취임식을 하기 전 미연방에서 탈퇴했다. 이 집단은 자신들을 남부연맹(Southern Confederacy)으로 칭했다. 이들은 링컨의 미연방을 더는 고락을 함께한 동료로 보지 않았다. 섬멸해야 할 새로운 적으로 간주했다. 남부연맹은 같은 해 4월 미연방의 요새 섬터(Fort Sumter)에 포탄을 퍼부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 남북전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링컨의 미연방이 승리했다. 그 결과, 노예제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포화가 이어진 지난 4년은 참담했다. 민간인과 군인 등 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끔찍했던 동족상잔의 비극 중 하나였다. 애써 일군 문명은 다시 진흙에 파묻혔다. 건물과 인도, 논밭과 수로 모두 피와 눈물에 절여졌다.

엘리후 베더, ‘스핑크스의 질문자’

뼛속 사무치는 고통은 국민 몫이었다.

그저 미국인이어서 자랑스러웠던 미국인들은 매캐한 연기 속에서 집단적 공황 증상을 겪었다. 이들은 눈앞 펼쳐진 생지옥에 허무해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명, 연인을 놓친 남녀의 비명에 괴로워했다. 옛 영광은, 그때의 축복은, 선술집에서 맥주 한 잔만 마셔도 행복했던 그 시절의 설렘은 돌아오지 않을 듯했다.

이토록 참혹한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베더의 ‘스핑크스의 질문자’가 미국 예술계에 공개된 것이었다.

미국인의 불안한 발걸음은 이 그림 앞에서 멈췄다. 이들은 화폭 속 폐허를 미국, 헐벗은 노인을 내전에서 살아남은 자신처럼 여겼다. “저희는, 그때의 영예를 되찾을 수 있습니까….” 누군가는 그림 앞에서 스핑크스에게 직접 말을 걸듯 이처럼 읊조렸을 것이다. 문명의 융성과 고난, 그런 뒤 다시 찾아오는 번영의 순간을 숱하게 봤을 스핑크스는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삶을 다시 꾸려갈 용기, 국가를 재건할 의지도 함 안겨줬다.

청년의 깨달음
엘리후 베더, ‘어린 마르시아스’

태양 옆에는 늘 구름이 따라붙고, 꽃이 피면 반드시 지고, 풍요로운 가을이 지나면 언제나 냉혹한 겨울이 온다.

이처럼 번성 후에는 틀림없이 위기가 따라온다. 하지만 이 순간이 곧 몰락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순간만 견디면 태양도, 꽃도, 가을도 늘 다시 찾아오는 법이다. 베더는 앳된 청년일 때 이러한 세상의 진리에 통달했다. 그는 겨우 스물일곱 살 때 ‘스핑크스의 질문자’를 그린 것이었다. 심지어 이집트는 가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림을 접한 사람 대부분은 세월의 풍파에 찌든, 이집트에 긴 시간 체류한 노(老)화가가 이 그림으로 그렸을 것으로 여겼다. 새파랗게 어린,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근처에도 가지 못한 화가의 작품인 걸 알고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베더는 그 짧은 생에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엘리후 베더, ‘어부와 인어’

베더는 1836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했다.

베더의 아버지는 유능한 치과의사였다. 어머니는 예술적 지식과 교양을 갖춘 여인이었다. 태어난 땅과 집안 모두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아쉬울 게 없는 뉴요커의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베더는 어릴 적부터 상실을 맛봐야 했다. 베더의 아버지는 경쟁이 심한 대도시를 견디지 못했다. 그는 뉴욕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향한 곳은 섬나라 쿠바였다. 낯선 땅을 개척해 새로운 삶을 살 생각이었다. 베더는 이 때문에 추억이 서린 길목, 함께 뛰어놀던 소꿉친구와 갑작스럽게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애달픈 마음 뒤 피어나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애틋함과 먹먹함 같은, 마냥 쓰라리지만은 않은 문학적 감정이었다. 소년은 원치 않게 정든 고향을 잃었지만, 그 대신 예술가로서의 감수성을 손에 쥐었던 것이다. 유년기에서 벗어난 베더는 뉴욕으로 돌아가 기숙학교 생활을 했다. 촉촉한 감성을 간직하고 있던 베더는 곧장 시와 미술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 혼자만의 상상을 마음껏 흩뿌릴 수 있는 미술의 매력에 푹 빠졌다. 다시 아버지가 변수였다. 아버지는 돈벌이가 되는 다른 일을 택하라고 강요했다. 예술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말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베더는 또 마음 고생을 했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했다. 베더는 외려 이 덕에 예술을 향한 자신의 진실한 열망을 절감했다. 자신도 놀랄 만큼 예술적 성취에 대한 욕망이 크다는 걸 깨달았다.

엘리후 베더, ‘어부와 지니(정령)’
엘리후 베더, ‘바다뱀의 은신처’

베더는 아버지의 콧방귀를 뒤로 한 채 프랑스 파리로 갔다. 이어 1858년부터는 이탈리아 소도시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 그는 1860년, 돌연 뉴욕으로 돌아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의 유랑을 못마땅히 본 아버지가 지원금을 싹 다 끊은 탓이었다. 베더는 거듭되는 곤경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뉴욕에서 무일푼 화가의 삶을 이어갔다. 카페와 골목을 오가며 보헤미안 예술가와 교류했다. 베더는 정해진 틀에 맞춰야 하는 아카데미식 회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유로운 성향을 지닌 보헤미안 동료와의 소통은 그에게 되레 좋은 배움의 기회로 다가왔다. 이쯤부터 베더는 독창적 스타일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직접 시를 쓰고 소설 구절을 달달 외우는 등 문장에도 관심이 컸던 베더는 자기 그림에도 문학적 감성을 본격적으로 녹여냈다. 그는 이 시기에 ‘어부와 지니(정령)’, ‘바다뱀의 은신처’ 등을 그렸다. 전자의 그림 속 나자빠진 어부와 모락모락 피어나는 정령, 후자의 화폭 속 숨죽이고 있는 바다뱀 모두 처연하고도 흥미로운 사연을 품고 있을 듯하다. 설화 문학 ‘천일야화’를 떠올리게 하는 환상적인 배경,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마술적인 묘사 또한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게 한다. 베더는 빈털터리가 돼 뉴욕으로 돌아온 덕에 외려 화풍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 활동도 할 수 있었다.

엘리후 베더, ‘Greek Girls Bathing’

돌아보니 항상 그런 식이었다.

부족할 게 없는 집안,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망, 깨우침을 위한 유학 등 그의 출발선에는 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쬈다. 하지만 막상 발을 떼면 모든 결정적인 순간에 폭풍이 몰아쳤다. 이를 오롯이 맞고 견뎠더니 거짓말처럼 새로운 태양이 재차 고개를 내밀었다. 베더는 이러한 삶의 궤적을 품었기에 남북전쟁의 절규 속 야심차게 ‘스핑크스의 질문자’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는 역사의 새옹지마(塞翁之馬)를 수백, 수천번 지켜봤을 완벽한 유적으로 수 천 년 묵은 스핑크스를 꼽았던 게 아닐까. 아울러 이집트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지만, 감성 어린 그에게 농밀한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스핑크스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봤자 이십대 중반인 그가 이처럼 세상사를 통달한 듯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유였다.

‘진짜’ 이집트의 감동
엘리후 베더, ‘Volterra’

남북전쟁이 끝난 그 해 베더는 다시 유럽으로 갔다.

베더는 특히 이탈리아에 매료됐다. 그에게 르네상스의 향수를 품은 이탈리아는 질리지 않는 나라였다. 베더는 그곳에 아예 터를 잡았다. 그 땅을 제2의 고향처럼 여겼다. 베더는 영국도 여러 번 찾았다. 자신처럼 문학과 회화의 접목, 배경과 인물에 대한 낭만적인 표현에 치중했던 라파엘전파의 결과물을 연구했다. 그사이 결혼도 했다. 베더와 그의 아내 캐롤라인 로즈크란스는 네 명의 자녀를 뒀다. 이 가운데 두 명은 오래 살지 못했다고 한다.

엘리후 베더, ‘해변의 스핑크스’

베더는 스핑크스를 소재로 한 작품 활동도 계속 이어갔다.

큰 인기를 얻은 ‘스핑크스의 질문자’ 이후 똑 닮은 그림을 요청하는 주문이 쇄도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베더는 스핑크스 그리기를 진심으로 즐겼다. 베더는 똑같은 구성만 고집하지 않았다. 1879년, 그는 ‘해변의 스핑크스’에서 여성의 상체를 가진 살아있는 생물체로 스핑크스를 표현했다. 백골의 퀴퀴한 냄새가 날릴 듯한 황무지에 핏빛이 섞인 하늘, 으스스한 바다까지 덧붙였다. 이번에는 덩그러니 놓인 스핑크스가 외로워보인다. 이 존재 또한 언젠가 다시 찾아올 햇빛과 꽃, 그리고 문명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엘리후 베더, ‘드로잉, 스핑크스, 이집트’

베더에게 1889년 겨울은 특별한 순간이었다.

미국인 부호 조지 콜리스가 이쯤 베더에게 이집트 여행을 제안했다. 가기만 한다면 여행비도 다 대겠다는 조건이었다. 베더는 환희에 젖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등 유수의 유적을 직접 관찰할 기회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그로서는 너무나도 짧은 5개월여 여행이었지만, 광기 어린 열정으로 200여점의 작품과 스케치를 그렸다. 꿈에 그리던 스핑크스 또한 직접 보고 그림으로 남길 수 있었다. “아름답고, 소박하고, 위대하다.” 이집트 풍경에 대한 그의 눈물에 찬 소회였다.

엘리후 베더, ‘플레이아데스’

이후 베더는 종종 미국을 들렀지만, 1906년부터는 쭉 이탈리아에서만 살았다.

그가 죽은 해는 1923년이었다. 여든일곱의 나이였다. 베더는 마술적 요소 등 문학적 상상력을 화폭에 가득 채웠다는 점에서 분명 선구적인 예술가였다. 동시대 미국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인상주의와 현대미술 사조 등에 가려져 천재성 대비 주목을 받지 못한 편이었다. 자극적 소재가 난무하는 요즘 시대에서 베더는 재차 주목받고 있다. 잠깐의 어두운 터널을 지난 그에게 다시 햇빛이 쏟아지는 듯도 하다. 베더가 남긴 우아한 상상력, 아울러 ‘스핑크스의 질문자’가 안겨주는 교훈은 인류가 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자산임은 분명하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로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특별전을 선보이며 지금도 ‘퍼스트 펭귄’으로 도전과 실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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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미국사 산책,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Elihu Vedder: American Visionary Artist in Rome, Madison, NJ: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Taylor, Joshua C., Perceptions and Evocations: The Art of Elihu Vedder, Smithsonian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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