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이야기꾼의 ‘원탁결의’가 만든 ‘조선누아르’, 지면과 스크린을 지배할 강력한 스토리의 탄생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고종이 독살될 뻔한 사건을 알고 있나? 커피로 말이지.”

“그래? 오호라, 그거 얘기 되는데! 독살미수범이 남자야 여자야?”

“남자.”

“여자로 바꿔야지.”

“그럼 커피는 러시아에서 왔으니까, 여자를 페테르부르크로 보내면 되겠구만.”

지난 2006년 싱가포르의 밤. 한 명은 문단에서 이름을 내기 시작한 소설가, 또 하나는 방송에서 온갖 세상사를 수집하던 PD. 두 동갑내기 이야기꾼이 모였다. 만담하듯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일주일 내내 호텔의 한 방에서 매일 한 가지씩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중의 한 편이 ‘가비’로 영화화된 소설 ‘노서아가비’였다. 고향(마산)친구인 두 사람은 금방 의기투합했다. 만나기만 하면 밤가는 줄 모르고 사람이 죽었다 살고 세상이 엎어졌다 뒤집어지는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함께 하는 데는 긴 말이 필요없었다. PD출신의 영화제작자와 대학교 국문학 교수 직함을 갖고 이런 저런 작품 기획을 하며 ‘따로 또 같이’ 하던 두 사람은 3년전 각자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아예 회사를 하나 만들었다. ‘원탁’이다. MBC PD 출신의 이원태와 소설가 김탁환(이상 46)이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공동으로 최근 소설 ‘조선 누아르-범죄의 기원’(민음사)을 냈다. ‘원탁’이라는 이름으로는 첫 작업 결과물이다. 소설 집필을 내내 했다는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지난 3일 두 사람을 만났다. “팔이 아플 때까지 번갈아 쓴다”는 작품처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두고 설왕설래 오가는 말에는 두 사람의 구별이 필요 없었다. 


“시나리오를 먼저 완성하고 소설을 뒤에 썼습니다. 소설에는 장면 별로 이루어진 시나리오가 일종의 지도 구실을 하지요. 소설은 지도를 따라가며 디테일을 완성하는 작업 과정입니다. ”

“한 사람이 팔이 아플 때까지 쓰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이어가지요. 집필하는 사람은 작품 속에 몰입이 돼서 한 발 떨어져 조망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키보드를 놓은 사람은 다른 아이디어가 마구 생겨납니다. 뜻밖의 소재와 사건이 생기죠.그럼 그것을 또 글로 ‘털어냅니다’. 소설이 바뀌면 시나리오도 변형이 되지요. 시나리오가 수정되면 소설도 새롭게 고쳐집니다.”


새로운 시도다. 두 작가의 공동작업도 그렇거니와 출판과 영상을 포함한 원소스 멀티유스를 애초부터 기획한 창작이라는 점도 그렇다. ‘조선누아르’는 먼저 시나리오로 완성돼 원탁은 지난 7월 CJ E&M과 영화화 계약을 맺었다. ‘원탁’은 원작자이자 기획자로 참여한다. 콘텐츠 제작 과정 전반에 창작자의 권한과 의도를 보장하고, 최고의 이야기를 구현하기 위한 모색이다. ‘허균, 최후의 19일’, ‘불멸의 이순신’, ‘나, 황진이’ ‘리심, 파리의 조선궁녀’ ‘노서아가비’ ‘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등 이미 몇 편의 소설을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으로 제공했으나 일부는 훼손ㆍ변형되고, 어떤 작품은 아예 제작되지도 못한 사례를 겪은 김탁환 작가의 경험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원작의 판권을 넘기면 그만인 기존의 계약과 영상제작 관행으로는 작품의 영상 구현과 콘텐츠의 수준을 보장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다. 


“소설을 내놓으면 영화사가 고르고 원작료를 주고 가져가는 과거 계약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죠. 저희가 먼저 이야기를 만들어 영화투자배급사에 제안합니다. ‘한국영화에서 이런 이야기는 없으니까 해보지 않겠느냐’고 말이죠. 경우에 따라 원작 뿐 아니라 기획, 제작, 연출의 권리도 저희가 요구할 수 있습니다. 서로 작품 내용에 대한 권한도 명확히 하지요. 콘텐츠를 놓고 영화를 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파트너십을 이루는 겁니다.”


두 사람이 공동 창작한 ‘조선누아르’는 빠르고 선이 굵으며 호쾌하지만 묵직하고 어두운 이야기다. 금주령이 시행되던 조선 후기가 배경이다. 남사당패 출신의 천민인 광대 나용주가 탁월한 검술실력을 바탕으로 밀주유통과 밀무역 등 지하상권을 움켜쥔 폭력집단 ‘검계’로 들어가 전국을 평정하며 당대 정쟁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비범한 학식과 덕성을 가졌지만 무수리출신 후궁 소생 천출인 왕자 호암군은 조정을 지배하는 정치세력 ‘갑론’에 의해 끊임없이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호암군은 검계와 결탁한 갑론을 제거하기 위해 검계 소탕을 목적으로 하는 척검방 대장 최만치를 내세운다. 살아남으려는 자, 강해지려는 자, 세상을 얻으려는 사내들의 이야기다. 명분은 이해의 껍데기일뿐이다. 선과 악의 구별이 없고, 신의는 배신과 다르지 않은 ‘역할놀이’일 뿐이다. 세상은 광대 나용주가 외줄 위에서 펼치던 탈바꿈의 놀이판이다. ‘조선누아르’는 천민 출신의 광대가 권력의 중심부로 가서 펼치는 한판 놀음을 그렸지만, 만민평등의 흔한 이상주의적 기획이란 애초부터 들어설 자리가 없다. 악과 악이 겨루고 힘과 힘이 충돌하며 욕망과 욕망이 부딪칠 뿐이다. 그래서 최후에 이루어지는 것은 당대 최고 정치권력과 무력, 금권의 결합이다. 독자가 소설의 마지막장에서 목격하는 것은 ‘악의 완성’이다. 


“우리 둘 모두 진짜 누아르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인생에는 선악이 없고 세상은 단지 극악과 차악의 대결로 이루어지며 어느 쪽이 이기든 모두 악이라는 것이죠. (갱스터) 누아르는 미국에서는 대공황 금주령 시대를 배경으로 했는데, 조선에선 영조 집권기가 금주령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영조가 관료의 목을 직접 칼로 벤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 사건과 누아르에 대한 두 사람의 지향이 ‘조선누아르’의 출발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범죄의 기원’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서 국가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이 책을 올해 꼭 출간하자고 둘은 결심했다. 김탁환은 책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주인공들과 함께 인간에서 짐승으로 추락하고 나니, 가을이었다. 아침마다 확인하던 사망자 숫자는 단식에 돌입한 이들의 숫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완성된 원고 앞에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이 소설의 인물들을 죽이고 싶어졌다. 주인공과의 이별을 따듯하게 아쉬워하던 다른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내가 쓰고 만든 살의(殺意)가 늘었다. 낯설고 아팠다”고 썼다. 


이원태와 김탁환, ‘원탁’의 두 사람은 ‘조선 누아르’를 포함해 지난 2년간 4편의 이야기를 각각 시나리오와 소설로 완성했다. 곧 발표될 차기작은 ‘조선마술사’다. 이 작품 역시 소설 출간 전 이미 롯데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이 끝나 유승호 주연의 영화로 제작이 돌입했다. 소설은 내년 여름 출간 예정. 또 다른 2편도 영화화와 소설 출간이 나란히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창작한 이야기를 무비(영화)와 노블(소설)을 합성한 말인 ‘무블’이라 불렀다. 도서 시장과 영상 컨텐츠업계에서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모색으로서 ‘원탁’과 무블의 파괴력의 양상이 어떻게 펼쳐질까 자못 궁금하다.

소설가 김탁환과 ‘원탁결의’한 이원태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와 ‘아름다운 TV 얼굴’ 등을 기획, 연출한 MBC PD 출신이며, 영화 ‘가비’와 ‘파파’ 기획에 참여했고, ‘오싹한 연애’를 제작했다.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

사진=윤병찬 기자 yoon4698@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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