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가 있는 곳에 그가 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바다 건너 칸에서도 베를린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 한국 영화를 쫓아다닌 세월만 30년이 넘었다. 그는 수많은 영화인들 가운데 모두가 존경하는 ‘어른’이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79)이 돌아왔다. 다시, 부산으로.
“창업이 어렵지만 수성은 더 어렵다. 한 단계 뛰어넘으려면 경장(개혁)이 필요하다.”

그는 최근 율곡 이이 선생의 말을 부쩍 자주 되뇌인다. 1996년 영화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부산국제영화제를 ‘창업’한 그는 초대 영화제부터 15회까지 집행위원장으로 재직하며 영화제 ‘수성’에 온 힘을 보탰다. 6년 전 명예집행위원장으로 한 발짝 물러났던 그가 올해 영화제 조직위원장으로 복귀한다.
2014년 영화 ‘다이빙벨’ 상영으로 촉발된 부산시와 영화계의 갈등을 봉합하고 영화제를 ‘혁신’의 단계로 도약시키는 임무가 그에게 주어졌다. 23일 서울 종로구 부산영화제 서울사무소에서 그를 만났다. 이날 하루에도 그는 시·분 단위로 쪼개진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란다.
▶칸 영화제서 “부산영화제 정상 개최 홍보”=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은 24일 영화제 임시총회를 통해 신임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서병수 부산시장이 “당연직으로 맡는 조직위원장 자리를 민간에 넘기겠다”고 선언한 지 석 달 만이다.
김동호 내정자는 총회 직전 폐막한 제69회 칸국제영화제에 7일간 방문했다. 개최가 불투명했던 부산영화제가 정상적으로 열린다는 사실을 알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의 오랜 친구인 강수연 집행위원장과 동행했다. 현지에는 ‘미스터 킴’이 돌아왔다며 반기는 영화인들이 많았다. “미리 알고 있더라고요. 축하한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올해로 그의 칸 영화제 방문은 21번째. 정확히 부산영화제 개최 횟수와 일치한다. 쌓아 온 친구들도 그만큼 많다. “부산영화제 시작할 때부터 계속 갔었고, 그 이후로는 매년 다녀왔죠. 많은 친구들이 영화제에 모이니까, 한 번 안 가면 인연이 끊어지잖아요. 그래서 작년하고 올해는 자비로 다녀왔지. 베를린하고 칸 영화제는 매년 자비로라도 간다는 생각이에요.”
조직위원장 자리를 제안받고 고심하던 김 내정자에게 칸 영화제는 일종의 ‘데드라인’의 의미였다. 매년 5월 개최되는 칸 영화제는 10월 부산영화제에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된다. 현지에서 많은 영화인을 만나 부산에 오도록 초청하고, 상영작을 선정하고, 영화를 보내달라고 설득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칸 영화제마저 넘기면, 부산영화제 개최 자체가 불가능하고 힘들어지죠. 그 상황에 직면하게 되니 나라도 빨리 조직위원장 자리를 받아들여서 스스로 해 나가지 않으면 영화제를 아예 못하게 되겠구나 하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고요. 그래서 수락을 하게 된 것이고, 이제부터 영화제에 전념할 수밖에 없어요.”

▶“영화제 죽일 수 없어”…고심 끝 수락= 김동호 내정자는 지금의 부산국제영화제를 일군 장본인이다. 첫회 때부터 부산영화제에 대한 전세계 영화인들의 추억은 독특하게 남아 있다. 1996년 첫 영화제 앞두고 식당이 모두 문닫은 밤 12시에 회의가 끝나자, 호텔 앞길에 신문지를 깔고 포장마차를 불렀다. 유명한 감독, 배우들과 밤새 소주를 들이켰다. ‘스트리트 파티’는 부산영화제의 명물이 됐다.
영화제가 열리는 남포동과 해운대를 오토바이를 타고 1시간 안에 오가면서 모든 술자리를 챙기기도 했다.
이처럼 그가 아끼는 영화제지만, 부산영화제의 신임 조직위원장 자리는 ‘독이 든 성배’ 격이다.
2014년 10월 ‘다이빙 벨’ 상영 논란으로 촉발된 부산시와 영화제의 갈등은 영화제 파행 위기까지 치달을 만큼 심각했다. 그동안 상황은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에 대한 부산시의 고발과 검찰 기소까지 이어졌다. 부산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데 대한 보복ㆍ표적 수사라는 말도 나왔다. 영화인들은 올해 영화제 보이콧을 결의했다.
영화인에게도 부산시에게도 영화제 파행은 결단코 피해야 할 선택지였다. 영화인들의 축제기도 하지만, 영화제 기간 국내외 관광객이 부산에 몰리는 부산의 잔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자꾸 흘렀다.
그가 망설인 시간도 많았다. 영화제 감사에서 지적된 상영작 선정 기준의 불투명성, 조직의 폐쇄성 등 운영상 문제의 책임에서 김 내정자 스스로가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내가 조직위원장을 맡는다는 게 적절치 않다는 생각으로 주저했고 처음에 거절했었다”라고 말했다.
김동호 내정자는 고심 끝에 “한 번 영화제 명맥이 끊기면 다시 바로 설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조직위원장 자리를 수락했다. “20년 동안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전해 온 부산영화제를 하루아침에 죽일 순 없잖아요.”

▶영화계 설득ㆍ정관개정ㆍ명예회복…남은 과제= 영화제가 개최되는 10월까지 할 일이 산더미다. 열흘 간 300여 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각국 프로젝트와 영화인들을 초청하는 것만도 벅찬 일이다. “어떻게든 해야지요.” (웃음)
하지만 영화계 일각에서는 김 내정자의 조직위원장 수락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검찰 기소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이 공개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조직위원장을 민간에 넘긴다는 ‘원포인트’ 개정만을 믿을 수 없고, 독립성과 자율성,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내용의 정관개정이 먼저 이뤄졌어야 한다는 견해다.
김 내정자는 이에 대해 “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부산영화제를 못 하거나 반쪽 영화제가 될 수밖에 없어서 마음이 급했다”고 이야기했다.
영화계가 주장하는 영화제의 독립성ㆍ자율성 보장 등을 명문화하는 정관개정은 올해 부산영화제를 무사히 치른 후 내년 2월 정기총회에서 이뤄질 예정이다.
“걱정이 많겠지만, 조직위원장을 제가 인계받은 이상 부산시는 정관 개정에 직접 관여하지 못하게 돼요. 제 주도로 한다면 영화계에서 바라는 내용을 얼마든지 관철할 수 있을 걸로 생각하고요. ‘집행위원장에게 영화를 선정하고 상영하는 고유의 권리가 있으며 여기에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정관에 꼭 집어넣을 거에요.”
그는 영화계의 보이콧 철회를 위해서도 발벗고 나서야 할 때다. “계속해서 서울과 부산의 영화인들을 만나면서 여기에 동조하고 저를 믿게 설득하는 게 남은 과제죠.”
▶올해 영화제는? “내실 다져”= 그의 계획대로라면 올해 영화제는 오는 10월6일 ‘정상적으로’ 개최된다. “다만 규모는 조금 축소될 거에요.” 그가 말했다.
“우선 부산시의 지원예산이 아직 확정된 상황이 아니고, 후원에도 차질이 있기 때문이에요. 영화제가 개최될 수 있을지 몰라 망설이거나 감사를 받아 지원을 주저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설득해서 스폰서도 받아야 하고요. ‘좋은 영화 300편 내외를 상영한다’는 영화제의 본질은 유지하되, 부대행사가 줄어드는 정도로 영화제가 진행될 것 같아요.”
몸집이 엄청나게 불어난 부산영화제에 대한 내실을 다지는 계기로 삼을 생각이다. “강수연 집행위원장과 상의해야겠지만 영화제 조직과 운영, 사업계획 등을 슬림(slim)화 하면서 지속발전가능한 영화제로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부산영화제에 대한 명예회복도 남은 과제다. 초대 영화제부터 그가 지켜온 ‘지원은 받지만 간섭은 받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다시 세우고, 사법부의 판단으로 넘어간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에 대한 명예를 복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이빙벨’ 이전에도 영화제에 대한 압박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독립 영화를 틀지 말라고 했다거나, 역대 정부에서 영화에 대한 의견들도 많이 들어왔죠. 그래도 영화를 계속 틀어 왔거든요. 그래서 ‘다이빙벨’ 사건이 더욱 안타까웠어요. 이제 명예를 회복해야죠.”
이세진 기자/jin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