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들롱이 1960년 주연 리플리 역을 맡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
“그는 스타 그 이상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기념비적 존재죠. 그는 전설적 배역들을 연기하며 전 세계를 꿈꾸게 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이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추모한 그는 1960년대 유럽 영화 황금기를 구가한 전설적인 대배우, 알랭 들롱이다.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로 스타덤에 올라 ‘세기의 미남’이라는 별명으로 인기를 누린 프랑스의 배우 들롱이 세상을 떠났다. 걸출한 외모, 뛰어난 연기력, 서늘한 카리스마로 지난 세기 지구촌 영화 팬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는 데뷔한 후 50여년간 90여편의 영화에 출연해 숱한 명작을 남겼다.
걸출한 외모, 뛰어난 연기력, 서늘한 카리스마로 지난 세기 지구촌 영화 팬의 마음을 사로잡은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이 지난 18일(현지시간) 89세 일기로 별세했다. 들롱이 2019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배우인 딸 아누슈카와 관객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게티이미지] |
들롱이 18일(현지시간) 프랑스 두시에 있는 자택에서 89세로 별세했다. 그의 세 자녀는 이날 “알랭 파비앙, 아누슈카, 앙토니, 루보(들롱의 반려견)는 아버지의 별세를 발표하게 돼 매우 슬퍼하고 있다”며 “그는 세 자녀와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화롭게 유명을 달리했다”고 전했다. 들롱은 지난 2019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스위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몇 년간 계속 악화돼 왔다.
프랑스 원로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는 AFP 통신에 “그 무엇도, 누구로도 채울 수 없는 거대한 공백을 남겼다”고 애도했다. 들롱과 함께 ‘들고양이’(1963)에 출연한 이탈리아 여배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그의 극중 이름이었던 ‘탄크레디’를 언급하며 “탄크레디가 별들과 함께 춤을 추러 하늘에 갔다”고 말했다. 프랑스 영화 제작자 알랭 테르지앙은 현지 라디오 방송에서 “프랑스 영화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고 전했다.
들롱은 1935년 파리 남부 교외에서 태어났다. 뚜렷한 이목구비로 아기 때부터 ‘미남의 정석’으로 불렸다. 오죽하면 그를 만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모친이 유모차에 ‘만지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적어놓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4살이 되던 해, 부모의 이혼으로 그는 위탁가정에서 맡겨졌다.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은 가출과 잦은 퇴학으로 점철됐다. 17살에는 해군에 자원해 입대했다. 그러나 복무 중 절도를 저질러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 사이공으로 파병됐다. 끝내 해군 기지에서 군 차량을 훔치면서 불명예 제대해 프랑스로 귀국했다. 이후 웨이터, 시장 짐꾼 등 온갖 잡일을 전전하다 칸 영화제에서 우연히 영화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셀즈닉의 눈에 띄어 영화계에 입문했다. 당시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들롱을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린 영화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태양은 가득히’(1960)다. 그는 신분 상승 욕구에 눈이 멀어 부잣집 청년을 살해하는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주인공 리플리 역을 연기해 내면서 단숨에 명성을 얻었다. 거짓을 사실로 믿고 싶어하는 살인자에게서 묻어나는 슬픈 눈망울이 마치 리플리 현실판을 보는 듯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냈다. 이 영화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배우’라는 별칭도 얻었다. 배우 신성일이 ‘한국의 알랭 들롱’으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도 이때 즈음이다.
이후 들롱은 차가운 눈빛과 퇴폐적인 매력을 앞세워 ‘프렌치 누아르’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는 주로 맡은 배역은 파국으로 점철된 하류 인생사를 증명하는 캐릭터였다. 묘한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그의 연기가 굴곡진 개인사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나오는 이유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들롱은 밑바닥 인생을 연기할 때 매력이 살아난다”고 표현했다.
들롱은 영화계에 데뷔한 후 9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 가운데 무려 80여편에서 주연을 맡을 정도로 프랑스의 독보적인 톱스타였다. 대표작으로는 ‘로코와 그 형제들’(1960),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 ‘태양은 외로워’(1962), ‘사무라이’(1967), ‘볼사리노’(1970), ‘레드 선’(1971), ‘암흑가의 세사람’(1970), ‘조로’(1975) 등이 꼽힌다.
들롱은 젊었을 때 독일 미녀 배우인 로미 슈나이더 등과 염문을 뿌리는 등 여성 편력을 과시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결혼했던 여성은 나탈리 들롱이다. 이 둘은 1964년 극비 결혼식을 올렸고 ‘고독’(1967)에서 호흡을 맞췄다. 들롱의 끊임없는 스캔들에 결국 이혼한 나탈리 들롱은 지난 2021년 1월 암으로 투병하다가 8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해외 주요 언론들은 들롱을 영화사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로 평가했다. AFP 통신은 “들롱은 프랑스 최고의 스크린 유혹자였다”고 했고, AP 통신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영웅을 연기하든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든 들롱의 존재감은 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 AFP 통신에 따르면 고인이 생을 마감한 그의 자택 앞에는 이웃과 팬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먼저 자택 앞에 꽃을 놨다고 말한 한 남성은 “프랑스 영화는 가장 위대한 인물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