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새롭게 출범한 일본 이시바 시게루(앞줄 가운데) 내각이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EPA] |
이시바 시게루 신임 일본 총리는 자민당 내 보수 인사들과 달리 온건한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고 과거에는 일본 전쟁 문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10월 조기 총선이 예고된만큼 당장의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기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4일 아사히신문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등에 따르면 이시바 총리는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한국 관계에 대해 “미국과의 양국 관계는 중요하다. 한국과도 그러하다”고 언급했다. 그는 “나라가 다르면 국익도 다르다”면서 “각각이 국익을 바탕으로 얼마나 진지하게 논의해 어떤 성과를 얻을까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발언을 두고 전문가들은 이시바 총리가 일본의 국익을 우선시하되 한국과의 관계가 악화할 가능성은 적다고 분석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한미일 관계에서 한국과의 관계 보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걱정하는 시각이 있을 것 같다”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 시 미국 중심주의로 갈 가능성이 있기에 그에 대한 우려로 국익을 거론한 것으로, 지금 한일 관계에 관해 특별히 이시바 총리가 걱정하거나 달리 생각할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일본의 국익을 위해 한국의 국익을 손상하겠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며 “일본의 국익을 증진하기 위해 한국의 협조가 필요할 수 있다. 필요에 따라 일정 부분 한국이 원하는 부분을 줄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이시바호 출범으로 한일 관계가 지금보다 개선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시바 총리는 자민당내 ‘비주류’ 인사로, 역사수정주의 경향을 상징하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특히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도 자민당 의원 중 드물게 일본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의 입장을 밝혀 왔다. 그는 2019년 8월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 이후 독일의 전후 반성을 언급하며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이시바 총재는 “우리나라(일본)가 패전 후 전쟁 책임을 정면에서 직시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며 “일본에도 한국에도 ‘오부치 게이조 총리·김대중 대통령 시대 같은 좋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 사이에 나온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공식화하고 이를 토대로 포괄적 협력방안을 담고 있다.
이원덕 교수는 “내년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라며 “한국에서는 한일 관계의 진전된 모습을 기대하는데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 다만 과거사 문제는 10월 조기 총선 이후 이시바 총리 내각이 안정된 후에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시바 총리가 9일 중의원(하원) 조기 해산에 이은 이달 27일 총선거를 예고하자 일본 내에서는 반발이 커지고 있다. 조기 총선을 강행할 경우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일본 역대 총리 중 취임일을 기준으로 최단 기간에 중의원을 해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이시바 내각 출범 후 지지율은 51%로 역대 내각 중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닛케이는 “2002년 이후에 출범한 정권 중에서 출범 직후 지지율이 역대 최저치”라고 전했다. 야당에서는 이시바 총리를 향해 ‘거짓말쟁이’, ‘변절자’ 등 거친 언사가 나오고 있다고 마이니치신문과 산케이신문이 전했다. 아사히신문도 이날 ‘국민 믿음을 해치는 언행 불일치’ 제하 사설에서 이시바 총리가 야당에 논쟁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당리 당략에 따른 선택을 했다고 지적했다.
박홍규 교수는 “총선에서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면 아베파의 반발 또는 아베파의 비판과 무관하게 당분간 이시바 내각이 유지가 될 것”이라며 “정적인 의석을 확보한다면 기시다 후미오 정권보다는 반걸음 정도 앞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시바 내각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과거사 문제에 대한 사죄 발언이 나올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원덕 교수는 “이시바 총리는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해서 한국을 이해해 주는 편이다”며 “전향적이고 전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마찰 요인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북관계에서도 이시바 총리가 적극적인 행보를 보일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이시바 총리는 “납북 피해자 문제는 우리 내각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강한 결의를 가지고 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납북 피해자 문제 해결책으로 평양과 도쿄에 상호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한 바 있다. 4일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이시바 총리는 일본 납북자 가족 모임 측에 연락사무소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다만 납북자 가족 모임은 연락사무소가 만들어질 경우 북한에 유리한 정보가 유포될 것을 우려해 개설을 반대하고 있다.
이원덕 교수는 “이시바는 정권이 안정되면 북일 관계는 아마 적극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서도 “다만 미국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북일 관계는 달라지기에 현재로선 단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제징용 문제에서 피해자가 원하는 수준까지의 전향적인 태도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지난해 3월 강제징용 배상 판결 해법으로 제3자 변제를 이행하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일본 기업이 전혀 참여하지 않는 등 여전히 해법이 어려운 상황이다.
박홍규 교수는 “일본 기업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 기업만의 기부금으로서 변제금을 충당하는 것은 국민적 반발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다른 무언가가 나오더라도 김대중-오부치 선언 수준 그 이상의 것이 나오기 힘들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김빛나·정목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