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치 하락 자금조달 우려
반도체·자동차 외교동력 상실
트럼프 2기 앞 불확실성 가중
재계가 윤석열 대통령의 심야 계엄령 사태로 정치적 리스크가 확대되고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사면초가에 내몰리고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대기업 빌딩들(위쪽)과 인천 중구 인천 선광남항야적장에 수출 대기중인 차량과 컨테이너 [헤럴드DB·임세준 기자] |
국내 산업계는 45년 만에 선포된 비상계엄 사태로 당혹감에 휩싸였다. 당장 환율과 증시가 크게 출렁이면서 이번 사태가 불러올 영향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특히 주가 밸류업을 위해 고심해왔던 기업들은 당분간 이번 ‘계엄 리스크’에 따른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분위기다. 민주노총이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하면서 산업 현장이 올스톱 될 수 있다는 우려감도 커지고 있다.
더 나아가 내년 1월 미국 트럼프 정부 2기 출범을 앞둔 상황에서 정쟁 악화 등 정치권에서 내홍이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경우 글로벌 사업 불확실성도 더욱 커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비상계엄 사태로 인해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 계속되게 되면 국회에서 그간 논의됐던 산업계 지원 법안 논의도 모두 멈출 전망이다. 올 한해 글로벌 경기 침체와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으로 고전했던 기업들로선 본업과 무관한 정치 리스크로 또 한 번 출구 없는 위기에 놓였다는 반응이다.
4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SK, 현대차, LG 등 주요 기업들은 계엄령 해제 이후에도 향후 전개되는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전날 밤부터 임원들을 소집해 경제계에 미칠 여파를 논의하며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당장 이날 오전 개장한 환율과 주식시장에서 발생한 혼란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하는 분위기다. 국내 주요 기업들이 올해 유독 지지부진한 주가 견인을 위해 고심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계엄 리스크에 따른 주가 하락은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정국이 비상계엄 사태로 급속 빠져들면서 반도체 지원법의 일몰 연장, 상속세 인하 등 당장 시급한 경제 현안들의 처리도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를 비롯해 자동차, 철강 등 글로벌 시장에서 힘겹게 경쟁하고 있는 기업들은 이에 따른 정치 리스크 확대를 가장 우려하고 있다.
오는 1월 트럼프 정부 2기 출범을 앞두고 대외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반도체·배터리·자동차 등 국가핵심산업에서의 민관 협동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러나 계엄령 상황 해제 후에도 불안정한 정치상황이 계속되면서 재계가 필요로 하는 정치외교 동력이 힘을 잃게 됐다.
재계 관계자는 “다행히 계엄 상황은 간밤에 마무리 됐지만, 탄핵 정국으로 갈 가능성이 커지며 주요 산업에서 한국의 외교적 위상이 위태롭게 된 셈”이라며 “트럼프 정부 2기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민관 협동이 중요한 상황에서 정치 리스크로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미국 반도체지원법(이하 칩스법)의 보조금 축소 및 관세 확대 등과 관련한 정부 차원의 외교적 대응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앞서 현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지원에 부정적 입장을 표하며 ‘당근’ 대신 관세를 부과하는 ‘채찍’ 방식으로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유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미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와 인디애나주에 HBM 및 패키징 공장을 짓겠다고 밝힌 SK하이닉스에겐 지정학적 리스크가 더욱 커진 상황이다. 때문에 반도체 업계에서는 민관 협동의 필요성을 강조해왔으나, 최근 미국의 추가 대중 수출 규제에서 한국산 HBM이 포함되는 등 정부가 경제 외교 차원에서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 한국과 달리 일본, 네덜란드 등 33개 국가들은 예외적으로 이번 규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자동차 업계도 이번 사태로 인한 시장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통상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 수출 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현대자동차그룹 등 주요 기업들은 미국 등 세계 곳곳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어 이로 인한 영향이 크지 않다. 그럼에도 트럼프 2기 정부 출범에 따른 관세부담 우려와 글로벌 경기 둔화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서, 이번 사태로 시장의 자동차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까지 이어질 경우 추가적인 타격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는 배터리 업계에도 향후 예상되는 시장 변화 등을 면밀히 파악 중이다. 미국 정부의 철강 쿼터(수출 할당량) 규제로 직격탄을 맞았던 철강업계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상황이다. 트럼프 당선인 미국 철강 산업 보호를 강력히 주장해 온 상황에서 추가 관세 등을 놓고 한미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김현일·김민지·양대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