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꿈을 꾼 천경자, 20년만에 회고전

‘꽃과 여인의 화가’…서울미술관 10주기 특별전
내년 1월 25일까지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
채색화 80여 점 집대성…여성 초상화들 눈길


천경자 ‘고(孤)’(1974). 자발적으로 고독을 즐겼던 작가는 이 작품에 자기 내면을 진정으로 마주한 행복한 고독을 담았다. [서울미술관 제공]


“꿈은 그림이라는 예술과 함께 호흡을 해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속에 서식을 해왔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천경자 ‘해뜨는 여자’)

엄혹한 시대, 여성으로 태어나 운명을 개척한 화가 천경자가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규모의 전시가 열린다. 서울미술관은 천경자 작가의 작고 10주기를 맞아 특별기획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내년 1월 25일까지 개최한다. 해당 전시는 지난 24일 개막했다. 천경자의 채색화 80여 점을 집대성한 이번 전시는 2006년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생애 마지막 전시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이후 약 20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전시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의 주요 작품과 함께 저서, 도서 장정, 작업 과정, 사진과 편지 등 아카이브를 소개해 그의 예술 세계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천경자를 상징하는 여성 초상화들이다. 그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현실에 밀착한 생동감 넘치는 인물화를 통해 운명에 맞서는 여성의 모습을 표현했다. 대표작 ‘고(孤)’(1974)는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머리에 꽃을 얹은 여인’의 모습이다. 우수와 고독이 서린 눈망울의 여인은 노란 옷을 입고 만개한 꽃을 머리에 쓰고 있다. 자발적으로 고독을 즐겼던 작가는 슬픈 외로움이 아닌, 자기 내면을 진정으로 마주한 행복한 고독을 담았다. ‘사슴’을 쓴 근대 여성 시인의 초상 ‘노천명’(1973)은 이어령이 창간한 월간 문학지성의 1973년 12월호에 실린 표지를 위해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의 영원한 주제인 꽃과 여인으로 표현된 노천명의 모습에 인품, 감수성, 사상 등이 응결돼 있다. 초기작 ‘춘우(春雨)’(1966)는 고향인 전남 고흥을 몽환적 분위기로 표현한 풍경화다. 바다, 마을, 산을 배경으로 파도와 어선, 아낙들과 좌판, 꽃나무를 그려 넣어 유년 시절의 기억을 설화적으로 풀어냈다.

낙원을 찾아 25년간 13번이나 세계 여행을 떠나며 그곳을 관찰해 그린 작품들도 소개된다. ‘베니스 산 마르코 사원’(1972), ‘케냐, 춤’(1974), ‘나바호족의 여인’(1988) 등 다양한 그림이 작가의 사진과 함께 전시돼 그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1972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우리 군의 활약상을 기록하기 위해 정부가 선정한 10명의 작가로 선정돼 기록화를 남기기도 했다.

천경자는 자신의 삶을 ‘슬픈 전설’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생각하고, 나이와 동일한 수의 페이지로 이름을 짓고 그림을 그렸다. 모험가이자 트렌드 세터였던 그는 91페이지로 생을 마감했다.

이번 전시 기획에 직접 참여한 안병광 서울미술관 회장은 “갈등과 상흔 위에 서 있는 천경자 선생님을 ‘모든 것을 환원한 최초의 작가’ ‘세월이 지우려 해도 존중받아 마땅할 예술인’으로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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