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비명으로 써 내려간 부활의 서사
제물의 대상 ‘여성’에서 ‘남성’으로 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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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만에 돌아온 국립발레단 ‘봄의 제전’ [국립발레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박 → 3박 → 2박 → 4박.
망치로 내려찍듯 몰아치는 리듬, 의도적인 화음의 충돌.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는 발레리노들의 몸이 무대를 가른다. 주먹을 꽉 쥔 채 팔을 펼쳐 뛰어오르다, 충돌하는 땅을 향해 다리를 내리꽂는다. 자신의 몸을 무기로 만든 거친 공격성에 대지의 에너지가 끓어오른다. 둘씩, 셋씩 무리를 이뤄 같은 동작을 추는 남성 무용수들은 어느 부족 사회의 전사들이었다.
국립발레단의 ‘봄의 제전’(8~10일, GS아트센터)이 관객과 다시 만났다. 2016년 이후, 무려 10년 만에 다시 찾아온 ‘봄의 제전’은 작품의 안무가인 글랜 테틀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막을 올리게 됐다. 전 세계 8개국의 대표 발레단이 테틀리의 탄생을 기념해 올리는 공연의 일환이다.
이날의 무대는 지난 10년간 국립발레단이 확장해 온 몸의 언어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각자의 신체를 극한으로 몰아치는 처절한 현장이 관객들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테틀리의 ‘봄의 제전’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품고 세워진 40분의 원초적 제의다. 이 곡은 등장과 동시에 20세기의 감각 체계를 뒤흔든 ‘충격’이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1913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을 올렸을 당시 폭동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왔다.
음악은 ‘봄의 도래’를 위해 처녀를 희생시키는 고대 슬라브 제의를 다룬다.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밀어붙이고, 원시적 박동처럼 리듬을 반복한다. 당대 사람들은 이 음악을 ‘폭력’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파리 초연 공연에선 야유와 고성이 터져 공연이 중단됐다. 그 유명한 ‘봄의 제전’ 폭동이다. 화려하고 세련된 ‘벨 에포크’의 마지막 시기 유럽에 등장한 전쟁 직전의 불안과 균열이 이 곡 안에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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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만에 돌아온 국립발레단 ‘봄의 제전’ [국립발레단 제공] |
스트라빈스키는 당시 이미 발레단 ‘발레 뤼스’의 스타 작곡가였다. 그는 어느 날 ‘젊은 처녀가 부족의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져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장면’을 환상처럼 떠올려 이 곡을 만들었다.
수많은 안무가가 이 작품을 재해석했다. 바슬라프 니진스키, 모리스 베자르, 피나 바우슈 버전이 특히 유명하다. 테틀리는 그 계보 안에서도 ‘육체의 야성’과 ‘집단 에너지’를 강조하며 인간의 신체를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테틀리의 ‘봄의 제전’은 발레와 현대무용의 언어를 뒤섞어 새로운 예술세계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원작을 비롯해 ‘여성’을 제물로 바쳤던 다른 발레와 달리 ‘남성’로 제물을 치환했고, 그것을 희생이 아닌 집단의 충동과 황홀경으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마치 디오니소스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무대. 어떤 음악도 존재하지 않는 ‘침묵의 숲’으로 남성 무용수(전호진)가 걸어 나온다. 아무런 소리도 만들어지지 않은 ‘태초의 공간’. 그의 몸짓은 거대한 제의가 시작되기 전 ‘원초적 숨결’에 가까웠다. 세계는 집단이 아닌 개인에게서 시작됐고, 개인의 희생으로 출발한다는 암묵적 메시지라도 던지는 듯 출발했다.
남성 무용수의 약동하는 독무가 이어진 뒤에야,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저음 악기 바순이 극단적인 고음역에서 토해내는 낯선 선율. 봄날의 파리 떼처럼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강렬한 동작을 이어가는 그는 ‘제의에 끌려 들어가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주는 일종의 ‘프롤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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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만에 돌아온 국립발레단 ‘봄의 제전’ [국립발레단 제공] |
피부를 겨우 감싼 의상만 입고 온몸의 근육과 뼈를 드러내는 몸짓은 ‘살아있는 존재’로의 각인이었다. 그의 호흡과 근육의 긴장이 잦아들기도 전, 전사처럼 집단의 무리가 등장한다. 주먹을 움켜쥔 손, 폭발적으로 튀어 오르는 도약, 서로의 몸을 밀고 충돌하는 군무는 전투 의식처럼 거칠었다. 생존 본능을 일깨우듯 땀으로 빛나는 무용수들의 몸은 끊임없이 숨을 헐떡였다. 남성 무용수들은 춤을 연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흔들리는 흉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발레가 ‘육체의 고통’을 감추는 예술이라면 테틀리는 완전히 다른 춤을 보여줬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리듬은 무용수를 몰아세우고, 짧은 동작을 집요하게 되풀이하도록 했다. 음악의 불규칙한 강세는 몸의 균형을 끊임없이 무너뜨린다. 그쯤 되면 관객은 극한 상태까지 몰리는 무용수들의 처절한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이 작품이 특히 혹독한 것은, 고전 발레의 테크닉과 현대무용의 바닥 움직임을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은 끊임없이 점프와 추락을 반복하고,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다시 세운다. 스트라빈스키의 불규칙한 리듬은 호흡조차 예측할 수 없다. 우아함을 유지한 채 고통을 감추는 기존 발레와 달리, 테틀리는 무용수의 피로와 헐떡임까지 안무 안으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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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만에 돌아온 국립발레단 ‘봄의 제전’ [국립발레단 제공] |
그러다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여성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세 명의 여성 무용수의 동작은 느리다. 남성의 춤이 수직적이고, 땅의 에너지를 폭발하는 충돌이었다면, 여성의 춤은 이들을 감싸 안는 유동적 흐름이었다. 허리와 골반의 움직임이 유연하고, 상체는 물결처럼 흘렀다. 갈고리처럼 휘어진 손끝은 허공을 향했다. 인도 수행자의 ‘무드라(mudra)’를 연상시키는 손동작은 조명의 그림자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종교적 아우라를 발산했다.
발레리나들의 춤은 봄의 생명력과 닮았다. 느리고 유연한 흐름 안에서 생동하는 계절의 번식력과 관능을 담았다. 춤이 달라지자, 스트라빈스키 음악은 또 다른 층위를 드러냈다.
‘남성 제물’이라는 설정은 고대부터 이어진 여성의 ‘희생 서사’를 뒤집는다. 애초 ‘봄의 제전’이라는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희생은 더 이상 ‘여성의 운명’이 아닌 공동체 유지를 위해 개인을 소모하는 ‘집단의 폭력’으로 확장한다. 남성 제물은 집단 속으로 빨려 들어가 욕망과 폭력, 황홀경 속에서 소진되고 붕괴한다. 죽음을 향해 치닫는 솔로에선 광기 어린 몰입을 담은 감정의 진폭이 처절하게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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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만에 돌아온 국립발레단 ‘봄의 제전’ [국립발레단 제공] |
무용수들은 토슈즈 위에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화를 그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서로의 몸 위에 올라타고 밀쳐내며 ‘거대한 군집’이 됐다. 개개인의 무용수보다 집단의 에너지가 먼저 만들어졌다. 상대의 몸을 디딤대 삼았고, 누군가는 몸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단 한 순간도 무용수에게 ‘휴식’을 허용하지 않는 일사불란한 도약은 스트라빈스키의 불규칙한 박자와 완벽하게 만나며 경이로운 전율을 안겼다. 마치 디오니소스 축제 같은 집단적 황홀경이었다.
파드되 장면에서의 성적인 은유들은 테틀리가 번역한 에로티시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남녀 무용수의 신체가 얽히고설키는 과정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담아낸다. 이 장면들은 그러나 성적 긴장감을 전달하기보다 생식과 생존의 본능을 그리는 방향으로 향한다. 김기완과 정은영은 그 지점을 정확히 그려냈다. 에로티시즘이 곧 번식이자 생명의 폭발, 결국 자연으로 회귀하는 순환 원리를 담아낸 것이다. 음악 역시 맥박처럼 끊임없이 약동하고, 리듬에 맞춰 몸 위로 몸을 얹는 무용수들은 하나의 생물 집단처럼 존재한다.
체력적 한계에 도달한 무용수들의 피로감은 ‘제의의 고통’으로 승화됐다. 전호진이 처절한 ‘희생의 춤’을 추고 군무진의 응축된 에너지가 폭발하자, 공기 역시 숨을 멎었다. ‘봄의 제전’은 발레라는 예술의 잔혹한 진실을 드러낸 무대였다. ‘아름다움’은 극한의 육체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것은 무용수의 형벌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원초적 제의를 마치며 무대에 남은 것은 소진 끝 도달한 생명력의 파동, ‘우아한 유희’를 비집고 나온 무용수들의 헌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