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한 감염자·멈춰선 이야기…그럼에도 ‘좀비’는 남았다 [리뷰]

21일 개봉 연상호 감독 신작 ‘군체’
감염으로 봉쇄된 빌딩 속 생존자들의 사투
진화하는 감염자…신선함 vs 예측가능성
‘인간붕괴 서사’의 상실…감정적 몰입감↓

 

영화 ‘군체’ [쇼박스 제공]

※ 영화 ‘군체’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촉망받는 천재 생물학자였던 ‘영철’(구교환 분)이 어두운 연구실에 앉아 경찰에 전화를 건다. 그는 서울의 ‘둥우리 빌딩’에서 벌어질 화학적 테러를 예고하며, 자신이 “유일한 백신”이라는 말을 남긴 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그의 예고는 곧 현실이 된다.

영철이 직접 감염시킨 첫 희생자를 시작으로, 둥우리 빌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감염자들에게 순식간에 점령당한다. 이 지옥 같은 아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봉쇄된 빌딩 안에서 끝까지 버티며 생존을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연상호 감독의 새로운 좀비 스릴러, 영화 ‘군체’다.

지난 21일 개봉한 영화 ‘군체’는 제한된 공간에서 감염자와 생존자가 맞서는 연상호표 좀비물의 공식을 그대로 계승한다. ‘부산행’(2016)의 열차, ‘반도’(2020)의 폐허가 된 한반도에 이어 이번 무대는 서울 강남 어딘가로 추정되는 거대한 빌딩이다. 그러나 ‘군체’는 익숙한 공간 설정 위에 다른 질문을 덧붙인다. 감염자들이 집단 지성을 통해 진화한다는 설정이다. 모두가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고 동일하게 사고하며 움직이는 새로운 종(種)의 탄생. 영화가 말하는 공포의 핵심도 결국 이 지점에 놓인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감염자 대 생존자’ 구도로 빠르게 진입한다. 테러 경고 직후 첫 감염자가 발생하고, 그 감염은 즉각적인 연쇄 확산으로 이어진다. 감염자들은 입에서 흰 액체를 쏟아내며 몸을 비틀고 뒤틀다가, 네 발로 돌진해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낸다.

영화 ‘군체’ [쇼박스 제공]

짧지만 강도 높은 이 과정 이후 소수의 생존자만이 남는다. 생물학과 교수 ‘세정’(전지현 분)과 전 남편 ‘규성’(고수 분), 빌딩 보안팀 직원 ‘현석’(지창욱 분)과 그의 누나 ‘현희’(김신록 분), 그리고 형사와 전직 육상 선수 출신 중년 남성,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이들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채 하나의 생존 공간에 갇힌다.

생존자들이 숨을 고르는 사이 감염자들은 진화한다. 경련하듯 몸을 떨던 감염자들은 이내 두 발로 일어서고, 무차별적 공격 대신 대상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세정은 이를 감염자들이 통신망으로 연결된 ‘집단 지성’을 형성했을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백신’과 함께 살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 순간 생존자들을 지켜주던 마지막 안전장치의 문이 열리고, 이들은 다시 감염자들이 장악한 빌딩 내부로 들어선다.

전반부의 속도감은 감염 사태의 확산을 거의 물리적인 압력처럼 밀어붙이며 관객을 끌어당긴다. 기괴하다는 단어로도 부족한 감염자들의 움직임, 끈적한 신체 변화,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진화의 징후는 이 영화가 “좀비가 주인공인 영화”라는 연상호 감독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현대무용수들이 표현해낸 괴이하고 섬뜩한 움직임과 표정들이 주는 불쾌하고 낯선 느낌도 영화를 보는 내내 지워내기 어렵다. 분명 이렇게나 좀비(감염자)를 자세히 들여다본 영화는 없었다.

동시에 영화는 ‘감염자’를 영화에 중심에 놓음으로써 본래 좀비물의 핵심으로 작동해온 인간성 붕괴의 서사는 거의 밀어낸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충돌, 공포 속 선택의 윤리, 공동체 붕괴의 정치성 같은 요소들은 희미하게만 남는다. 그럼에도 남아있었던 희생과 용기 등에 대한 메시지도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영화 ‘군체’ [쇼박스 제공]

 

영화 ‘군체’ [쇼박스 제공]

같은 맥락에서 생존자들의 서사 역시 평면화된다. ‘백신’이 생존자보다 더 중요하다며 날뛰는 형사의 행동은 신념인지 욕망인지 끝내 구분되지 않고, 대부분의 인물은 충분한 전사 없이 기능적으로 소비된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서사적 무게 없이 ‘사고를 유발하는 존재’로만 남았다 사라지는 여고생 캐릭터다. 인물의 소거 방식마저도 서사의 긴장보다는 소모에 가깝다.

감염자의 진화 설정 역시 양날의 검이다.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감염자의 등장은 분명 강한 불안을 만들어낸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공포는 단순한 생존 위협을 넘어 정체성의 위기로 확장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설정은 영화가 구축해 온 긴장 구조를 약화시키기도 한다. 감염자가 ‘이해 가능한 존재’로 변하는 순간, 상황은 예측 가능한 영역으로 이동하며 좀비물이 원래 갖고 있던 통제 불가능성은 희석된다. 결국 공포는 확장되기보다 정리되는 방향으로 수렴한다. 초반의 속도감 있게 몰아치는 전개가 후반으로 가면서 서서히 얇은 층위의 서사들에 발목잡혀 느려지는 것도 아쉽다.

그럼에도 ‘군체’는 끝까지 장르적 쾌감을 놓지 않으려 한다. 한정된 공간, 폐쇄된 구조, 추격과 탈출이 반복되는 기본 공식도 여전히 유효하다.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붙잡아 두는 추진력도 유지된다. “관객들이 그저 재미있게 즐기는 영화이길 바란다”던 연상호 감독은 그 목적을 이룬 듯 보인다. 기대를 뛰어넘는 감염자들의 ‘활약’만으로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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