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초’ 김대중·‘동지’ 이희호의 투쟁
이희호 메모·편지 등 20편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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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2년 청주교도소에서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 [한길사] |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저의 남편은 정치인으로 정당한 정치활동을 했으며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실현시키는 것을 소원으로 삼았습니다. 나날이 말살되어 가는 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정치인으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고자 투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회복과 인권회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1981년 이희호 여사가 국제사회에 김대중의 인권회복을 요청하기 위해 쓴 편지)
5·18광주민주화운동 46주년을 맞아 한국 민주화 투쟁의 상징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감옥 안팎에서 남긴 기록을 담은 ‘김대중·이희호 옥중기록’이 출간됐다. 김 전 대통령이 ‘3·1 민주구국선언’과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 사건’으로 수감됐던 1976~1982년의 옥중 기록과 이 여사의 메모, 편지, 국제 구명 활동 자료, 재판 기록 등을 담았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옥중 편지와 함께 이 여사가 작성한 옥중 면회 메모 9건, 국내외 인사들에게 보낸 편지 7건, 기타 기록 4건 등 친필 기록 20건이 최초로 공개돼 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주화운동의 국제 연대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반려자를 넘어 민주화운동의 동지로 함께 투쟁했다. 책의 제목이 ‘김대중·이희호 옥중기록’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장은 14일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수감 기간 이희호 여사의 이름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감자는 김대중이었지만 모든 대외 활동과 연락, 구명 운동 창구는 이희호였다”며 “이 여사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동반자 역할을 했다. 본인 또한 중요한 한국의 인권운동가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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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여사의 면회 준비 메모. [한길사] |
김 전 대통령의 기록에는 장기간 투옥으로 겪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직후 발생한 의문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심각한 고관절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수감 중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었다. 또한 박정희 정부에서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겪었기 때문에 암살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후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병실은 감옥보다도 나쁜 지옥이었다. 그가 “제발 교도소로 보내달라”며 단식까지 할 정도였다. 감옥병실에 수용된 채 정보사 요원과 군인을 포함한 수십 명의 감시 속에서 생활해야 했고, 창문이 가려진 방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펜과 종이는 지급되지 않았고, 독서 역시 제한적으로만 허용됐다.
치료를 거부한 그의 고관절 상태는 점차 악화돼 출소 직후 혼자 일어서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졌고, 이후 평생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 했다.
당시 이 여사가 그린 서울대병원 감옥병실 구조도는 ‘인동초’로 알려진 김 전 대통령이 겪은 고통의 실상과 독재 권력의 인권 탄압 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번에 최초 공개된 면회 메모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이 시기 “자포자기하며 발광 직전까지도 간 적이 있다. (중략) 내 일생 이토록 치욕스럽고 괴로웠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바깥에 있는 가족을 먼저 걱정했다. 펜이 지급되지 않아 못으로 눌러쓴 1978년 메모에는 “요사이 당신의 건강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내 일보다 몇 배나 걱정을 하고 있소. (중략) 현재의 나를 돕는 최대의 길도 당신 건강이니 내 걱정을 생각해서라도 소홀히 생각 말도록 거듭 당부하오”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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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이희호 옥중기록’ 기자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한길사] |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세상을 연결하며 구명 운동을 벌였다. 국제 뉴스를 메모로 압축해 전달했고, 박정희 대통령과 서울구치소장에게 편지를 보내 이감을 요청했다.
국제사회에 김 전 대통령의 상황을 알리는 데도 힘썼다.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 미키 다케오 일본 총리, 서독 인권단체 등 해외 정치 지도자와 국제 인권단체에 지속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또한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가족들과 함께 공개재판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스스로 투쟁의 주체로 활동했다.
이 여사는 1978년 서독 인권단체에 김 전 대통령의 고통을 알리는 글에서 “구속은 본질적으로 협박 수단으로서 협박은 국민이 두려워할 때 정부의 무기다.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명예로 알며 기꺼이 구속될 때는 압제자의 무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때는 민중의 무기가 된다”고 결연히 말한다.
김 전 대통령의 3남인 김홍걸 김대중·이희호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도 적당히 타협해 목숨을 살리라는 말씀을 한 번도 안 하시고, 적극적으로 해외에 구명 운동을 하셨다. 국제적 연대가 이뤄져 결국 아버지가 석방될 수 있었다”면서 “어머니는 결혼 때부터 단순히 남편이 아닌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 성평등을 위해 나아가는 동지라 생각했기 때문에 고난이 와도 굴하지 않고 싸우려는 마음이 준비돼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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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이희호 옥중기록’. [한길사] |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은 상황에서도 정치 보복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46년 전의 기록들은 현재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책을 출간한 한길사의 김언호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사상가였다. 한 거인이 걸어 온 과정을 좀 더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새 정치를 펼치는 데 담론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면서 “한국 정치의 도약을 위해서는 김대중이라는 그라운드를 밟으면서 함께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