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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샤 키스가 리드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헬스 키친’ [Marc J Franklin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7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재즈 트럼펫 소리가 들려온다. 16층에선 끝없이 이어지는 피아노 선율이, 또 다른 층에선 오페라의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복도를 걸으면 ‘전설’ 같은 음악가들의 고뇌와 마주친다. 미국 뉴욕 맨해튼 웨스트 43번가, 1990년대 초반 마약과 폭력 범죄가 들끓던 무법천지 ‘헬스키친(Hell‘s Kitchen)’의 한복판에 ‘맨해튼 플라자’가 자리하고 있다.
화려한 브로드웨이 극장가에서 고작 한 블록 떨어진 이곳은 당시 뉴욕에서 가장 위험하고 낙후된 슬럼가였다. 저소득층 예술가들을 위한 공공 임대 주택으로 기능했던 이곳에서 ‘그래미 15관왕’의 알앤비(R&B) 스타 앨리샤 키스(Alicia Keys)가 예술적 맹아를 키웠다. “밤마다 헬스키친 거리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와 사이렌 소리를 덮기 위해 피아노 건반을 더 강하게 내리쳤다”는 소녀에게 이곳은 훗날 자신의 음악 세계를 채운 충만한 자양분이었다.
앨리샤 키스의 자전적 성장담을 고스란히 투영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헬스키친’이 한국에 상륙한다.
앨리샤 키스는 최근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브로드웨이에서 ‘헬스키친’을 공연했던 극장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자랐다”며 “늘 극장 앞을 지나다녔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수많은 공연을 보며 언젠가 저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고 유년 시절을 반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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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앤비 스타 앨리샤 키스 [Warwick Saint 제공] |
앨리샤 키스가 뮤지컬 작업에 착수한 것은 무려 13년 전이다. 그의 첫째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된 장기 프로젝트였다.
그는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은 놀라운 여정이었다”며 “수많은 사람이 하나의 비전을 위해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큰 영감이 됐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시작점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내 인생의 가장 뜻깊은 성취 중 하나로 남아있다”고 소회를 들려줬다.
작품의 크리에이티브 팀이 화려하다.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극작가 크리스토퍼 디아즈(Kristoffer Diaz)가 극본을 맡았고, 뮤지컬 ‘렌트’와 ‘디어 에반 핸슨’을 연출한 브로드웨이의 거장 마이클 그라이프(Michael Greif)가 메가폰을 잡았다. 오프-브로드웨이 퍼블릭 시어터에서의 개발 공연을 거치며 완성도를 끌어올린 끝에, 지난 2024년 브로드웨이 본 무대에 입성했다.
현지 매체들은 이 작품을 “최근 브로드웨이 주크박스 뮤지컬 중 가장 성공적으로 서사를 안착시킨 사례”라고 평한다. 뉴욕의 거리 에너지를 무대 위에 감각적으로 구현했을 뿐 아니라, 기존 히트곡들이 극적 맥락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정서적 변곡점으로 재탄생했다는 점에 찬사가 쏟아졌다.
작품은 199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삼는다. 앨리샤 키스는 “내가 자랄 당시의 뉴욕은 대담하고 강렬했으며, 자기만의 색이 분명한 도시였다”면서도 “뉴욕을 경험하지 못한 관객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간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캐릭터’로 기능하는 뉴욕의 정서 때문이다.
“‘헬스키친’을 새로운 도시에서 올릴 때 관객들이 이곳을 실제로 경험해 봤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뉴욕은 단순한 지리학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이에요. 꿈을 좇고, 가족과 공동체를 발견하며,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국경을 초월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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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샤 키스가 리드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헬스 키친’ [Marc J Franklin 제공] |
뮤지컬엔 대중에게 친숙한 앨리샤 키스의 히트곡들이 늘어선다. 그렇다고 단순한 나열에 그치지는 않는다.
키스는 “기존 음악을 작품 안에 녹여내는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노래들이 이야기 속에서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무대 위 주인공 앨리는 거리의 소음과 두려움을 집어삼키기 위해 피아노 건반을 부서질 듯 내리친다. 그의 메가 히트곡인 ‘폴린(Fallin’)’이나 ‘이프 아이 에인트 갓 유(If I Ain’t Got You)’가 매끄럽게 가공된 팝송이 아니라, 헬스키친의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서 생존하기 위해 질렀던 비명이자 갈망이라는 것을 음악적으로 증명해 내는 대목이다.
남녀 간의 사랑 노래였던 ‘노 원(No One)’은 극 안에서 엄마와 딸 사이의 치열한 애증을 대변하는 강력한 연대의 찬가로 변주되고, ‘이프 아이 에인트 갓 유’는 앨리와 그의 음악적 뿌리인 아버지 사이의 정서적 교감을 잇는 가교로 기능한다.
그는 “노래가 단순히 극 사이에 삽입되는 소모적 역할을 넘어서 서사와 감정을 전면에서 견인해야 했다”며 “워크숍 과정을 거치며 음악적 완성도와 캐릭터에 진짜 필요한 정서 사이의 균형을 찾는 데 집중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전통적인 뮤지컬 스타일의 어법을 차용한 신곡 ‘세븐틴(Seventeen)’을 추가해 극적 추진력을 더했다.
싱어송라이터에서 브로드웨이의 ‘리드 프로듀서’로의 확장은 키스에게 또 다른 형태의 투쟁이었다. 브로드웨이 개막 당시 그는 백인 남성 엘리트 중심으로 구축된 브로드웨이 제작 생태계에서 흑인 여성 프로듀서로서 마주해야 했던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을 꺼내기도 했다. 자본을 유치하고 자신의 비전을 관철하기까지 13년이 걸린 이유다.
그는 이름만 걸어두는 프로듀서에 머물지 않고 안무가 카밀 A. 브라운과 함께 90년대 뉴욕 스트리트의 정체성을 고증하는 데 집중했다. 팀버랜드 워커, 오버사이즈 데님, 당시 청소년들의 반항적 에너지를 상징하는 콘로우와 브레이드(땋은 머리) 헤어스타일 등 복식 디테일을 무대 위에 완벽하게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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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샤 키스가 리드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헬스 키친’ [Marc J Franklin 제공] |
키스는 “브로드웨이의 예술성과 비즈니스 사이의 균형, 거시적인 장기 전략을 바라보면서도 미시적인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균형’을 찾아낸 것이 프로듀싱 여정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강조했다.
집념의 대가는 달콤했다. ‘헬스키친’은 2024년 제77회 토니상에서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여우주연상(말리아 조이 문 분)과 여우조연상(케시아 루이스 분)을 가져갔다.
키스는 “이제 막 첫발을 내딛는 신인의 화려한 시작과 30년 이상 브로드웨이를 지켜온 베테랑의 커리어가 동시에 인정받는 현장의 중심에 우리 작품이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보람찼다”고 했다.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줄기는 모녀의 치열한 애증이다. 키스는 무대가 그려내는 모녀 갈등이 실제 자신의 10대 시절 기억과 90% 이상 일치한다고 고백했다.
“이 이야기에는 제 어머니인 테리아 조셉(Terria Joseph)과의 관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어머니는 제 인생 내내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제 삶에 예술과 음악이라는 세계를 선물해 준 구원자였습니다.”
싱글맘으로 거친 우범지대에서 홀로 딸을 키워내야 했던 그의 어머니는 극도로 엄격한 통금 시간과 간섭으로 딸을 통제했다. 키스는 “당시엔 엄마의 과보호와 규율이 감옥 같아서 격렬하게 반항했다”고 돌아봤다.
작품의 진짜 이야기는 성장통 이후 시작된다. 그는 “앨리는 많은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게 되고, 그 이야기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라며 “앨리는 우리 눈앞에서 변해가며 어머니의 사랑이 가진 힘과 의미를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숨 막히던 엄격함 역시 거리의 범죄와 타락으로부터 딸을 지켜내기 위해 어머니가 온몸으로 친 방공호라는 것도 알게 된다.
브로드웨이엔 무수히 많은 작품이 있지만, 그 안에서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엄마와 딸 사이의 지독하고도 거룩한 유대는 의외로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자주 다뤄지지 않는다”며 “이러한 강력한 시선을 관객들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프로듀서로서 큰 기쁨”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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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샤 키스가 리드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헬스 키친’ [Marc J Franklin 제공] |
이번 한국 공연을 통해 앨리샤 키스는 생애 가장 경이로운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노래들이 한국어로 가창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언어로 불리고 있지만, 서사의 본질과 감정은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제 노래가 한국어로 울려 퍼지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기에, 제겐 이 자체가 커다란 선물처럼 느껴져요.”
캐스팅 과정에서 키스가 가장 눈여겨본 덕목은 기술적 탁월함을 넘어선 ‘진정성’이었다. 언어와 대사를 초월해 감정적 연결감을 뿜어내는 한국 배우들의 압도적인 역량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이다. 한국 초연에서는 한국 뮤지컬계를 이끄는 명품 보컬리스트 손승연, 김수하, 박지원이 앨리 역을 맡고, 그의 어머니 저지 역은 박혜나와 최현선이 캐스팅돼 밀도 높은 드라마를 완성한다.
“이 작품 안에서 누구나 자기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될 것입니다. 당신의 꿈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절대 잊지 마세요. 그리고 가족과 공동체가 지금의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