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중첩과 경계 너머의 ‘그것’…이지현·임수범 개인전

이지현, 아라리오서 4년 만 국내 개인전
기억 속 이미지 재구성…시공간 뒤섞여
임수범은 용, 사방신 등 미지의 존재 형상화


이지현 작가가 6월 30일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김현경 기자]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다양한 시공간의 중첩과 경계 너머의 존재.

독창적인 작품으로 관람객을 다른 세계로 끌어들이는 두 개의 전시가 한 공간에서 열린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은 1일부터 내달 8월 15일까지 이지현 개인전 ‘몽환서: 소란한 공백’과 임수범 개인전 ‘어젯밤 바라본 금빛 용의 신기루’를 개최한다.

미국 뉴헤이븐에 기반을 두고 작업하는 이지현 작가는 ‘기억’ 속 이미지들을 회화로 재구성한다. 화면 속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기억이 뒤섞인 장면이 펼쳐진다. 전시 제목인 ‘몽환서’는 작가의 연작 ‘판타즈마(Fantasma·환영)’에서 따온 것으로, 기억과 상상, 믿음과 경험이 뒤섞인 가상의 필사본을 뜻한다.

국내에서 4년만에 여는 이번 개인전은 회화 22점을 선보인다. 전시 공간인 갤러리 1층, 3층, 4층을 한 책의 다른 장처럼 서로 다른 화풍의 작업들로 꾸몄다.

먼저 1층에선 개인적 신화를 다룬다. 대규모로 제작된 ‘스피놀라 시간’(2020~2025) 연작은 기도문과 시편, 삽화를 담은 16세기 채색 필사본 ‘스피놀라 시도서’에서 영감을 받았다. 시도서에서 발췌한 이미지들과 작가 자기 삶에서 온 기억들을 혼합해 재해석했다.

‘스피놀라 시간_7월 사자자리’(2023~2025)와 ‘스피놀라 시간_12월 염소자리’(2023~2025), ‘경계_모래사장_1’(2011) 등에는 모두 모래사장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저마다 다른 기억을 간직한 모래사장이다.

작가는 “개인의 기억이 반복되면 일종의 신화처럼 되는 것 같다”며 “작가 역시 각자의 신화를 짓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이지현 개인전 ‘몽환서: 소란한 공백’ 전경. [아라리오갤러리]


3층의 작업은 기억의 구조를 다룬다. 이번 전시에 맞춰 제작된 ‘봉인된 정원’(2026)과 ‘시간의 정원을 돌보는 이’(2025) 등 근작이 서울에서 처음 공개된다.

이들 작품에는 모호한 대상이 가득한 풍경 위에 기하학적 요소가 레이어(층)의 형태로 덧씌워져 있다. 이는 의식의 층위를 상징하는 조형 요소로, 이미지에 질서를 부여하고 평면인 회화가 입체적인 공간감을 갖게 만든다.

4층 전시장에서는 신체적 행위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밑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드로잉하듯 작업한 연작은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표현의 과정을 보여준다.

신작 ‘구조와 잔상’(2026)은 작가가 오랫동안 수작업으로 만들어 온 인형과 뜨개질한 실 등의 오브제가 회화의 일부로 포함돼 있다. 특히 ‘인형’은 이지현 회화의 한 요소이자 그 자체로 작품이기도 한 중요한 축이다. 작가는 “인형은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만든 기억이 담긴 대상”이라며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아이와도 같이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지현은 회화가 “기억의 기록이자, 망각에 대한 저항이며, 시간을 넘어 계속해서 생성되는 또 다른 미래의 기억을 향한 시도”라고 말한다. 그는 “기억은 기찻길처럼 일렬로 쌓이지 않는다. 기억의 상태를 나타내려면 단면을 잘라서 그 안에 있는 다른 생각과 공간,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 가장 리얼리티가 있는 작품일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임수범 작가가 6월 30일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김현경 기자]


갤러리 지하 전시장에선 임수범의 ‘어젯밤 바라본 금빛 용의 신기루’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개인전으로, 미지의 장소와 명명되지 않은 존재들을 다룬 회화 및 도자 62점을 선보인다.

임수범은 인류 이전부터 존재했을 만물의 의식을 상상하며 인간의 언어나 지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경계 너머의 존재들을 화면으로 소환한다.

작가는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면서 작업을 한다. 사실 인간이 우주 안에서 볼 수 있는 물질이 5% 정도고 나머지는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는 항상 어떤 것들을 이름 짓고 규정하려고 시도한다”며 “그러면 그 중간에 있고 경계에 있는 것들을 우리가 잘 못 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 작업들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가운데 내려앉은 ‘어젯밤 바라본 금빛 용의 신기루’(2026)와 이를 둘러싼 4점의 사신 연작을 만난다. 고구려 고분 강서대묘의 벽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지만, 주작의 다리가 4개이고 백호는 꼬리가 2개로 갈라지는 등 익숙한 사방신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를 통해 사신이지만 미묘하게 괴물처럼 보이는 모습을 연출했다.

작가는 “‘우리가 신과 괴물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사신도 경계 안에서 봤을 때는 우리를 보호해 주는 신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경계 바깥에서 보면 경계를 넘지 말라고 지키고 있는 괴물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림의 위치나 방향을 도치시킨 것도 기존의 개념을 뒤집고, 인간이 바라본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의도에서다. 전시는 이분법을 넘어 낯선 존재에 대한 사고의 확장과 새로운 차원으로의 연결을 시도한다.

‘허물어진 경계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이야기들’(2026)에선 군집해 있던 존재들이 각각 독립된 소품으로 다시 그려지고, 특정 작품에 등장했던 도상이 다른 작품 속에 예기치 않게 나타나며 서로의 화면을 넘나든다. 꼬리를 물고 겹치는 화면은 하나의 고정된 서사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며 인지 너머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한다.

임수범은 물성의 탐구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시간을 부여한다. 화면에 모래를 뿌리고 아크릴 물감을 겹쳐 올려 고분 벽화처럼 마모된 시간의 질감을 만들어내거나, 오랜 시간 형태가 보존되는 도자로 형상화한다.

작가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며 “이분법적인 구분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경계의 대상을 탐구하며 이들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사고의 확장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지현, 임수범 작가는 오는 9월 열리는 국내 최대 아트페어 ‘키아프 서울’에 출품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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