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약장수’ 박철민 “폐건물 촬영도 낙원 같았다”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넥타이 맨 남자들이 여자 속옷을 뒤집어 쓰고 춤추고 노래한다. 아들같은 이들의 재롱에 노인들은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여흥이 끝나면 샴푸와 홍삼이 탁자 위에 오르고, 본격적인 영업이 시작된다. 이 곳이 바로 ‘홍보관’이다. 영화 ‘약장수’(감독 조치언·제작 ㈜대명문화공장)는 노인들에게 건강식품이나 생활용품 등을 비싼 값에 파는 홍보관, 일명 ‘떴다방’을 소재로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

극 중 홍보관을 이끄는 점장 ‘철중’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효(孝)가 사라진 시대에 노인들에게 효를 파는 장사꾼일 뿐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초짜 ‘약장수’에게 “돈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훈계하는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제 앞가림에 바빠 가족과 이웃을 살필 여유가 없는 시대, 그 시대가 만든 악인 ‘철중’을 연기하면서 배우 박철민(48)은 어느 때보다 설렜다.


“대본을 읽을 때부터 짜릿했다. ‘이런 배역이 나에게 한 번은 오는구나’ 싶더라. 그래서 모든 걸 제쳐두고 한다고 했다. 닻을 올린 다음엔 잘 할 수 있을 지 걱정이 많았다. 목소리의 강약을 어떻게 할 지, 눈에 조금 더 힘을 줘야할 지, 고민을 거듭했다. 골프를 처음 칠 때 힘을 빼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힘을 빼면 공이 나가지도 않는다. 억지로 힘을 써서 근육을 키우고 스윙을 키운 다음에야 힘을 빼는 방법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연기해보고 반복 연습하다보니, 완전히 힘을 뺐을 때 오히려 깊이를 가지고 만족감이 생기는 지점이 있더라.”

‘약장수’는 순 제작비가 4억 원인 저예산 영화다.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 50억~60억 원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같은 날 개봉하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제작비(약 2400억 원)와 비교하면 600분의 1 수준이다. 박철민은 일찌감치 개런티는 포기했다. 대신 관객 수 40만 명이 넘으면 10만 명 당 1000만 원을 받기로 했다. 그 마저 그의 주머니로 들어가진 않는다. 얼마 전 기자 간담회에서 수입이 생기는대로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던 것. ‘또 하나의 약속’(2013)에 이어 두 번째 노개런티 출연이다보니 부담스러울 법 했지만 기우였다. 그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쳤다.


“저예산 영화에 참여할 때는 개런티는 욕심 내지 말자고 생각한다. 내가 상업 영화나 드라마, 공연 등을 안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데서 수입이 있으니까 괜찮다. 연극하는 후배들에게 소주 한 잔 사줄 수 있고, 아이들 학원 보낼 수 있는 사정은 된다. 영화가 잘 돼서 이익이 생겼을 때 그 걸 좋은 곳에 쓸 수 있다면 행복한 일 아닌가.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배우가 되는 거다. 앞으로도 작품성이나 캐릭터만 보고 참여한 작품에서 수익이 난다면 얼마든지 나눌 생각이다.”

박철민이 수입에 연연하지 않고 작품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가 늘 양지(陽地)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영화 ‘목포는 항구다’(2004), 드라마 ‘뉴 하트’(2007), ‘베토벤 바이러스’(2008) 등의 작품에서 코믹한 감초 캐릭터로 사랑 받으면서, 한동안 비슷한 캐릭터의 시나리오만 그 앞에 쌓여갔다. 일각에선 박철민표 코믹 캐릭터를 두고 ‘정형화됐다’, ‘식상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스스로 족쇄처럼 느낄 때도 있었다. 지난 해엔 세 편의 작품 출연이 줄줄이 무산되면서 크게 좌절했다. 그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면 갈 데가 없겠다’는 두려움에 짓눌려, 짬뽕집을 차릴까 야구장 관리를 해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은 다른 일로 내 갈증을 채울 수 없겠구나 싶었다. 배우로서 카메라 앞에, 무대 위에 설 때 맛있는 먹거리나 야구도 즐거울 수 있는 거지, 부수적인 즐거움이 주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힘든 시기가 지난 뒤 ‘약장수’, ‘조선마술사’, 드라마 ‘하녀들’,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 등이 연이어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약장수’가 처음 들어온 작품인데, 작품이 들어온 것 자체가 행복했다. 부천의 폐건물에서 촬영했는데, 이상한 냄새도 나고 에어컨도 없었지만 나에겐 낙원이었다.”

박철민은 ‘약장수’를 시작으로 다시 바쁘게 촬영 현장과 무대를 오가고 있다. ‘약장수’의 홍보 활동은 물론, ‘조선마술사’ 촬영에,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까지 강행군이다. 그에겐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영화, 대중들을 겁 없이 크게 만날 수 있는 드라마,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연극”,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현장이 없다. 그러면서 “지치지 않고 배우로서 나만의 매력을 만들어가는 게 숙제”라며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얼마 전 ‘아침마당’에 출연했는데 CP(책임프로듀서) 분이 ‘배고픈 시절이 분명히 있었는데 왜 힘들지 않았다고만 얘기하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난 정말 배고픈 적이 없었다. 고기 먹고 싶을 때 못 먹었다고 배고팠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라면만 먹더라도 신났다면 (상대적으로) 배고픈 시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춘들을 만나면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일치되지 않으면 잘하지는 못해도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한다. 잘하는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우울하게 사는 것보단, 밥을 굶어도 덜 배고프 게 느껴지는 삶이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숱한 좌절과 부침을 겪었지만, 연기에 미쳐서 이 길을 걸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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