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등 美 현지기업과 접점 늘려
배터리 3사, 트럼프 2기 행정부 보조금 축소 움직임 ‘촉각’
‘속도 조절’ 기조 속 현지 생산 시설 추진 진행형
![]()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8일(현지시간) 워싱턴의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공화당 의원들과 회의를 마친 후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
[헤럴드경제=서재근 기자] 자동차·배터리 업계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현지 투자’ 카드를 꺼내 들었다.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기조 아래 반(反) 전기차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운 트럼프 당선인이 두터운 관세 장벽을 세우기 전에 현지에 생산시설을 세우고 주요 기업들과 접점을 넓혀 불확실성을 극복하겠다는 전략이다.
![]() |
현대차그룹이 지난해 10월 미국 조지아주에 준공한 친환경차 전용 공장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전경. [현대차그룹 미국법인 제공] |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역대급’ 성적을 거뒀지만, 트럼프 2기 체제에서 수출 환경이 급변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분주한 모양새다.
20일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하이브리드차 중심의 고부가차량의 현지 생산 확대 등 사업 전략을 서둘러 재편하고 있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 전년 대비 3.4% 늘어난 170만8293대의 자동차를 판매, 역대 최다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는 양사 전체 글로벌 판매량의 4분의 1에 달하는 수준이다.
양사가 미국 시장에서 매년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와 미국 우선 정책을 고려할 때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는 우려섞인 전망도 나온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국내외 자동차 산업 현황 및 2025년 전망’ 보고서에서 “한국 자동차 수출의 대미국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 후 단기간 내 관세를 부과하면 수출에는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대차그룹이 현지 생산 확대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하이브리드 차량 생산에 집중해 시장 내 영향력을 넓혀가겠다는 전략이다.
실제 현대차그룹은 최근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전기차 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서 전기차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차(HEV)도 생산할 수 있도록 공장 설계를 변경했다. 이를 통해 연간 생산 규모를 기존 30만대에서 50만대로 끌어올리겠다는 복안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이 같은 혼류 생산이 가능해지면 현대차그룹의 미국 내 생산 비중은 70%까지 확대된다.
![]() |
현대차그룹 GSO 본부장 김흥수 부사장(왼쪽)과 엔비디아 오토모티브 담당 리시 달 부사장이 파트너십 체결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제공] |
미국 주요 기업과 파트너십을 넓히기 위한 움직임도 분주하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10일 인공지능(AI) 칩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현대차그룹은 파트너십 체결을 계기로 SDV(소프트웨어중심의자동차), 로보틱스 등 모빌리티 설루션을 지능화하고, AI 기술 적용 범위를 사업 운영 전반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해 9월에는 미국 대표 완성차 제조사 제너럴모터스(GM)와 승·상용차, 전기차(EV), 수소를 포함한 친환경 에너지 공동 개발과 생산 등을 골자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외에도 현대차는 GM, 포드, 토요타 등 북미권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주요 완성차 업체들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기부금 행렬에 동참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현대차가 대통령 취임식에 기부금을 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현대차 대변인은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에서 “현대차는 미국 제조업을 지원하고 공급망을 보호하며 혁신을 촉진하는 정책에 대해 새 행정부와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환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
![]() |
국내 배터리 3사는 주요 고객사가 있는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 전기차 배터리 공장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각사 제공] |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장기화로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배터리 업계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달라질 시장 환경에 예의주시하면서도 현지 생산시설 투자 계획을 원안대로 이행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주요 고객사가 있는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 전기차 배터리 공장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 약 7조2000억원을 투자해 차세대 원통형 배터리 생산 라인을 구축하고, GM과 합작법인으로 추진한 얼티엄셀즈 3공장을 인수해 단독 공장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SK온은 올해 포드와의 합작사 블루오벌SK의 켄터키 1공장과 테네시 공장, 조지아주의 현대차 합작 공장 등 3곳의 가동을 시작한다. 삼성SDI 역시 미국 스텔란티스와의 합작사(JV)인 스타플러스 에너지(SPE)의 생산공장 4개 라인 가운데 1개 라인을 지난해 말 조기 가동한 데 이어 올해 1분기부터 나머지 3개 라인을 차례로 가동할 예정이다.
관세 리스크까지 더해지는 등 불확실성이 커졌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를 단행해 지속가능한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으로 읽힌다.
박태성 한국배터리산업협회 부회장도 최근 열린 ‘트럼프 2.0 배터리 정책 대응 세미나’에서 “우리나라는 대미 배터리 최대 투자국가로서 미국 러스트벨트 지역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특히 트럼프 2기 기간에 대부분의 생산시설이 완공된다”라며 “트럼프 2기 출범을 계기로 우리 기업의 현지 배터리 제조공장이 미국의 과도한 중국 배터리 공급망 의존을 완화하고, 양국 배터리 협력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전기차 소비 보조금을 대폭 줄이고, 배터리 소재에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연일 나오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현지 투자에 비례해 얻을 수 있는 혜택도 분명히 있다”라며 “단기간에 전기차 업황이 큰 폭의 성장세를 보이지 않더라도 현지 캐파(생산능력)를 꾸준히 늘려 미래 전동화 수요를 대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