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팩토리 남겨진 방대한 기록물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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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마크 팻츠폴이 공동 작업한 ‘삼원소를 위한 목업’(2989) [세종문화괴관]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1983년, 51세였던 백남준은 젊은 30대 판화가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마크 팻츠폴. 미국 신시내티에 ‘클레이 스트리트 프레스(Clay Street Press)’라는 판화 공방 겸 화랑을 열고 수백 명의 미술가와 협업한 그였다. 팻츠폴에게도 이 만남은 특별했다. 백남준이 제안한 건 단순한 판화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팻츠폴은 TV와 비디오로 구성된 ‘TV 조각’ 연작 ‘로봇 가족’(1986)을 포함, 백남준이 구상한 다수의 프로젝트를 10년 이상 함께 작업했다. ‘백남준 팩토리’라 불린 작업 공간이 주요 무대였고, 팻츠폴은 명실상부한 백남준의 수석 디자이너 겸 테크니션이었다.
그 역사적 순간들이 기록된 방대한 아카이브를 공개하는 전시가 시작된다. 백남준과 팻츠폴의 협업을 조명하는 전시 ‘로봇드림: 백남준 팩토리 아카이브’가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2관에서 개막한 것이다. 지난해 부산에서 열린 아카이브 전시에 이어 두 번째로 기획된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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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독일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출품작으로 선보인 백남준의 설치 작품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조용히 연주하라’ 포스터 [세종문화회관] |
알려져있다시피 백남준에게 TV는 단순한 영상 매체가 아니었다. 그는 TV를 조각 재료로 활용해 전통적 조각의 개념을 확장했다. 여러 대의 TV를 쌓거나 배열해 하나의 조형물처럼 만들었고, 화면에 특정한 영상이나 패턴을 송출해 시간성과 움직임을 부여했다. 이런 예술세계를 가리켜 백남준은 ‘TV 조각’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번 전시에는 1980~90년대 백남준의 대표작인 ‘TV 조각’ 작품에 쓰인 연구 스케치와 설치 도면, 사진을 오려 만든 목업(모형)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물 300여 점과 같은 시기 제작된 판화 20여 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백남준과 팻츠폴이 협업한 첫 판화 모음집이자 백남준 특유의 유쾌한 드로잉적 요소가 드러나는 ‘V-아이디어: 선험적’(1984), 백남준이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혁명가 8명을 8개의 TV 조각으로 형상화한 시리즈를 판화로 제작한 ‘진화, 혁명, 결의’(1989)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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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마크 팻츠폴이 공동 작업한 ‘보이스 보이스 스케치’(1990) [세종문화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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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과 마크 팻츠폴이 공동 작업한 ‘보이스 보이스’(1990) [세종문화회관] |
절친인 독일의 예술가 요셉 보이스의 상징적인 회색 펠트 모자를 TV 모니터 위에 씌운 ‘보이스 보이스’(1990)도 눈길을 끈다. 해프닝과 우연성을 중시한 전위 예술운동을 전개한 백남준과 보이스는 예술가를 샤먼이나 무당으로 봤다. 2차세계대전 중 중앙아시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타타르족의 보살핌으로 극적으로 살아난 뒤 예술의 주술적인 면모에 심취했던 보이스가 로봇으로 재탄생된 과정이 스케치에 고스란히 담겼다.
1997년 백남준이 독일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출품작으로 선보인 설치 작품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조용히 연주하라’ 포스터도 만날 수 있다. 작가의 탄생연도인 1932년을 상징하는 32대의 은색 자동차 안에는 브라운관과 케이스가 분리된 고물 TV, 전선 등 산업 부산물이 가득하다. 20세기 대표하는 기술적 산물인 자동차와 TV의 종언을 암시하는 백남준의 주제의식을 엿보다 보면 과거의 혁신이 필연적으로 폐허를 남기는지, 더 나아가 우리는 영광의 시대를 지나 버려진 유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같은 묵직한 질문이 떠오른다.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백남준 전문가들의 토크 콘서트가 네 차례 진행된다. 오는 9일에는 백남준의 또 다른 기술 협업자였던 이정성 아트마스터 대표와 팻츠폴이 참여해 백남준과의 협업 과정, 작품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4월 6일에는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스케치와 백남준의 사이보그를 통해 르네상스와 21세기의 인간관을 이야기한다.
전시는 4월 27일까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