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 찾아온 슬럼프…발성 모두 바꿔
팔색조 창법 자유자재 “장르로 기억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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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운터테너 이동규 [ANRC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는 ‘생태계 파괴자’였다.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야 할 이름의 등장에 다른 참가자들은 일순 사색이 됐다. 한국에서 세계 무대로 이름을 알린 1세대 카운터테너. 무대 위에서 시시각각 얼굴과 목소리를 갈아 끼운 팔색조다. 지난 2023년 방송된 남성4중창단 경연 프로그램 ‘팬텀싱어’(JTBC)에 그가 나타났다.
“사실 이전 시즌마다 출연 제안이 왔었어요. 그땐 심사위원으로 초대하면 가겠다고 했었죠.(웃음) 그러다 자발적으로 참가했어요.”
시간은 2022년으로 거슬러 간다. 국제 무대에서의 오랜 활동을 하다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이 자신의 ‘여름 캠프’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형, 동생으로 지내온 오랜 인연의 러브콜에 그는 6년 만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카운터테너 이동규(47)는 그날을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돌아본다. 이미 세계 무대를 사로잡은 뒤 한국에서 ‘신인의 마음’으로 다시 첫발을 디뎠다.
최근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서 만난 이동규는 “내년이면 데뷔 30주년인데 돌아보니 그 무렵이 내 음악 여정의 변곡점”이라고 했다.
‘팬텀싱어’에 출연을 고심할 때, 소속사에선 우려가 앞섰다. 워낙 데뷔한 지 오래돼 상황이 다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클래식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경쟁이라면 이미 도가 텄다. 열세살에 두 살 위의 형과 캐나다 밴쿠버로 조기유학을 떠나 성악가로의 꿈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숱한 콩쿠르를 발판 삼아 이름 석 자를 알린 사람이 바로 이동규다.
그는 “내심 낙하산으로 본선에 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이 나이 먹고 이걸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며 웃었다. 철저한 절차를 통해야만 TV에 얼굴이라도 비출 수 있는 프로그램이 ‘팬텀싱어’였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도전했어요. 해외에선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해왔지만, 한국무대에 서지 않은 시간이 길다 보니, 대중에겐 낯선 얼굴이고 업계에선 잊혀진 사람이 됐어요. 당시 ‘이름은 기억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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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운터테너 이동규 [ANRC 제공] |
한국인 성악가들의 노래 실력은 세계 무대에서 이미 찬사의 대상이다. 유수 오페라하우스에선 ‘한국인’이 없으면 무대를 올릴 수 없다고 말할 정도다.
이동규도 마찬가지였다. 2005년 이탈리아 무지카 사크라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1위에 오른 이후 이듬해 빈 국립오페라에서 ‘한여름 밤의 꿈’ 주역, 독일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에서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에서 ‘라다미스토’ 주연으로 무대에 서며 그는 삽시간에 유럽을 사로잡았다. 영화 ‘파리넬리’를 보고 카운터테너의 꿈을 키웠고 “파리넬리의 환생”이라는 유럽 평단의 찬사를 들었지만, ‘팬텀싱어’ 출연 전까지 한국에서의 그는 대중에겐 신인에 불과했다.
모든 커리어를 내려놓고 참가한 프로그램에선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매라운드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오디션을 장악했다. 그는 “오래도록 서바이벌 선수 생활을 하다 보니 경쟁하는 것도 즐기게 됐다”며 “수많은 콩쿠르에서 듣도 보도 못한 동양인 카운터테너로 모두 다 죽여주겠다는 각오를 다져왔기에 ‘팬텀싱어’에서도 간만에 설렜다”고 했다. 당시 프로그램에선 포르테나 팀으로 2위를 차지했다.
그날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재능은 아무리 노력해도 숨길 수 없었다. 이미 성악 장르의 매력에 취한 중장년 여성 시청자들이 ‘팬텀싱어’의 든든한 팬덤이었고, 나날이 높아진 시청자들의 ‘취향의 벽’을 이동규는 단숨에 넘었다.
“사실 성악가들에게 무슨 팬덤이 있어요. 저도 그런 시대를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는데 저를 아껴주고, 저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깊이 알아가고 들어주는 팬들이 생기더라고요.”
2030 팬들이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중장년 팬덤이 공연마다 찾아와 열렬히 지지한다. 포토카드가 들어간 CD도 놓치지 않고 구매하는 모습은 K-팝 팬덤 못잖다. 각종 TV 프로그램 출연은 물론 공연 기회도 늘었다 .
불과 2년 사이 두 장의 앨범이 나왔다. 지난해 세계 3대 클래식 음반사인 워너클래식에서 데뷔 앨범을 냈고, 최근 워너클래식 산하 레이블 ‘에라토’에서 정규 2집 ‘바로크로그’를 발매했다. 그는 “직전 앨범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고 익숙한 곡들을 담았다면 이번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곡이지만 바로크 시대의 정수를 담은 음악을 색다른 색깔로 풀어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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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운터테너 이동규 [ANRC 제공] |
이번 앨범은 이동규의 음악 인생 11년을 관통한다. 2014년 프랑스에서 테오르보 연주자 브루노 헬스트로퍼와 녹음했으나, 앨범으로 나오지 못해 파묻혔던 노래 6곡을 건져냈다.
강산도 변하는 10년의 세월 동안 이동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목소리의 변화가 크다. 그때만 해도 “입만 열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성량과 기교를 뽑아냈던 때”였다. 지금 와서 들어보니 그는 “11년 전엔 유연하고 기교가 넘치는 목소리였다면 지금은 파워와 테크닉을 적절히 버무린 목소리”라고 했다.
이번 앨범에선 크로스오버 장르를 넘나든 이동규의 장기가 담겼다. 재즈 발성을 가미해 1500년대 음악의 정수를 만든다. 유럽의 바로크 음악과 한국의 바로크 시대의 대표곡인 ‘자진아리’도 들을 수 있다. “이 곡을 할 수 있었던 건 100% ‘팬텀싱어’로 인연을 맺은 (김)수인(국립창극단)이 덕분”이라며 이동규는 웃었다. 이 곡들은 모두 다가올 그의 단독 리사이틀(9월 30일, 예술의전당)에서 들을 수 있다. 앨범에 참여한 피아니스트 조윤성,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가 함께 한다.
그는 “록발라드,팝, 재즈를 현대 클래식 음악의 재료로 섞되 내 귀에서부터 거슬리지 않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며 “10초만 들어도 더 듣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한 곡 한 곡 작업했다. 재해석과 재창조를 통해 다양한 클래식의 매력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이동규에겐 2015년쯤 슬럼프가 왔다. 그때는 그가 이탈리아의 오페라 명가 라스칼라에서 데뷔했던 해다. 어느 순간 중간 음역대를 내는 것이 불편해졌다고 한다.
“성악들은 운동선수와 같아요. 체조나 육상선수와 비슷하죠. 몸을 써야 하기에 테크닉이 제일 중요한데 노화가 오면 유연성이 사라져 은퇴를 빨리하잖아요. 발레 무용수도 마찬가지죠. 나의 후두가 얼마나 유연성이 있냐가 지속가능성의 관건인데, 30대 중반부터 변화가 슬슬 오더라고요.”
아직 남들은 괜찮다 했지만, 스스로 우울하고 심란한 시기를 겪었다. “카운터테너는 수명이 짧다는 속설이 정설처럼 다가왔다. 해답을 찾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3년. 성악과 교수인 친구가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 답을 줬다. “나이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동안 수많은 돈을 쓰면서 레슨을 받았던 것도 말짱 도루묵이더라고요.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을 실감했다. 열여덟 살에 데뷔해 오래도록 몸에 익힌 습관들을 하나씩 지워갔다. “목에 힘을 주던 버릇”을 고치려 발성부터 새로 시작했다.
대중은 완전히 달라진 이동규의 목소리를 기억하나 지금의 그는 지난 10년간 피땀 흘린 노력의 결실이다. ‘고난의 수련’을 거친 덕에 목소리를 갈아 끼우는 팔색조 창법도 자유자재다.
부족함 없이 자라 일찌감치 시작한 유학 생활이었으나, 그의 학창 시절은 녹록지 않았다. 유학 생활 중 가세가 기울어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레스토랑에서 서빙과 설거지를 했고, 하숙비가 모자라 집주인을 마주치지 않으려 아침마다 몰래 등교했던 날도 있다. 중학교 땐 폐병까지 걸렸다.
그는 “누구나 인생에 허들이 있다. 누군가는 삶에 ‘한 방’이 올 거라 믿지만, ‘한 방’이라는 건 없다. 그건 늘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준비 없는 자에겐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으로 나를 돌아본다”고 했다. 고난 같은 소년 시절을 지나온 그의 노래엔 삶이 스민다.
“제게 음악은 생계이자 직업이에요. 어린 시절 가진 열정과 야망에 더해 이젠 직업인으로의 삶도 생각하게 돼요. 언제 망가질지 모르는 이 악기를 언제까지 쓸 수 있을까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요. 그때까지 이동규라는 장르로, 사람들이 기억해 줄 수 있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