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국민훈장 받은 LA한인사회 ‘마당발’ 하기환씨

제14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 국민훈장 무궁화장 유일한 포상 

훈장증앞에놓고
하기환 회장이 부인 하경희 여사와 국민훈장 무궁화장 훈장증을 앞에 놓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하기환씨 제공>

하기환 전 LA한인상공회의 회장이 지난 11일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전달받았다.

정부가 수여하는 훈포장 가운데 가장 훈격이 높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은 지난 10월 5일 제14회 세계 한인의 날을 기념해 선정한 유공자 88명 중 하 전회장이 유일하다.

사실 LA한인사회에서 하기환이라는 이름 석자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유명하다.

평화통일 자문회의 LA협의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한인회,한인상공회의소,윌셔센터 코리아타운 주민회의 의장, 한인시니어센터 건립위원장 등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단체의 회장 뿐 아니라 크고 작은 후원회에도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코리아타운 한복판의 길거리에도 ‘닥터 하기환 스퀘어’라는 표지판이 있다. 캘리포니아주립대(UCLA)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터에 ‘닥터’라는 경칭이 붙는다.

충청북도 천안시만한 한인인구(60만)가 있는 LA지역에서 그가 소유한 건물에 있는 식당을 가지 않을 수가 없고, 그가 주인인 그로서리 마켓(한남체인)에서 장보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문을 펴면 그의 사진과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라면 그 ‘유명세’를 짐작할 만하다.그런 이가 이제서야 한국 정부의 포상을 받게 된 것은 다소 의아스럽다.

훈장
하기환 회장이 받은 국민훈장 무궁화장

◇적도 친구도 많은 성격…”좋은 게 좋다는 말 가장 싫어해”

LA한인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판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이민경력이 오래된 올드타이머들 사이에서 ‘하기환’이라는 이름은 시비의 대상이다. LA이민사회의 초창기부터 30여년 이상 온갖 잡사를 함께 다루며 옳다,그르다를 따지며 살아왔기에 악명이 높다. 한마디로 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꼽혔다.

“그랬지요? 시비의 소용돌이마다 늘 내가 있었지…”

무궁화장을 받게 된 소감을 듣고자 오랜만에 통화하며 “왜 그렇게 싸움꾼 소리를 듣느냐”고 물었더니 껄껄 웃으며 부인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한인회장을 지낸 4년 동안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해 코리아타운내 노숙자 셸터 건립 반대 운동이 한창일 때도 유독 찬성하는 의견을 내 욕을 먹었다.

“남들이 힘으로 누르려고 하면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편이지요.”

그가 말하는 억누르려는 힘이란 언론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다. 인간적인 모욕을 주는 경우일 때는 말할 나위도 없다.

지역 언론이 단체를 쥐고 흔들려고 한다고 느꼈을 때 그는 남들처럼 굽히지 않았다. 맞대거리로 나섰다. 목소리가 달리자 스스로 주간신문을 만들어 자신의 입장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을 정도였다. 적당히 타협하고 협력하면 좋았을 터인데 성격적으로 그러질 못하는 편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좋은 게 좋다라는 겁니다. 똑바로 잡아나가지 않으면 뒤틀리는데 뭐가 좋은 게 좋겠습니까.”

그의 반발심리는 성장환경에서 비롯됐을 지도 모른다. 의사였던 부친이 워낙 완고하게 다스렸다. 성장기의 아들은 끓는 피를 주체하기 어려운데 부친은 당신이 정한 틀 속에 가둬 키우려 했다. 권위에 대항하고 반발하는 습성은 그때부터 생겼을 것이라고 하씨 스스로 추정한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편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기저기서 부르고 커뮤니티 활동에 자신이 낄 자리가 생기는 것은 적이 많은 만큼 지지자도 많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골수’ 하기환 팬입니다. 아무리 싸워도 인간적인 모욕감을 주는 일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스스럼없이 만나고 교류를 이어가지요. 나름대로 내가 의리는 있는 편입니다.”

손해 나는 것을 알고도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 의리가 있는 사람들과 만나며 인생을 즐기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둔다고도 했다.

총영사랑
지난 11일 박경재 LA총영사(맨 왼쪽)로부터 총영사 관저에서 훈장을 전달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하기환 회장<하기환씨 제공>

◇뒷말 많은 단체장 두루 섭렵…”한인사회 정치력 키워야”

욕 많이 먹고 적이 생기는 커뮤니티 활동에 그토록 집착해온 까닭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우리 한인사회의 경제적 역량에 비해 정치적 파워는 여전히 약한 현실을 고치고 싶었던 거지요. 1992년 4·29 폭동이 일어났을 때 한인사회에선 전화 한통 걸어서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지요. 뼈저린 경험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한인커뮤니티가 미국사회에서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그가 30여년 넘게 각종 단체활동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였다. 얼마든지 파워를 키울 수 있는데도 결집되지 않으니 스스로 목소리를 높였고, 목청이 열리면 시끄럽고, 시비가 따랐을 거다.

“나도 영락교회 신자이지만 우리 한인사회의 연간 교회 헌금액이 아마 2억달러 규모는 될 겁니다. 그 0.5% 만 정치력 키우는 데 활용하면 뭐든지 얻어낼 수 있는데 그게 안되거든요. 한인들이 천국 가는 데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커뮤니티의 힘을 기르는 데 인색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비슷한 맥락에서 그는 지난해 코리아타운에 노숙자 쉼터를 짓는데 대해 한인회를 비롯, 한인사회에서 거세게 반발해 무산시킨 일을 아직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난 우리가 편협했다고 봅니다. 한인들이 미국사회에서 성공하고 있지만 우리만 편하게 잘살고 주변의 타인종이나 소외된 계층을 무시하는 것에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노숙자들에게 점퍼, 담요, 텐트 등 무수한 도움의 손길을 주던 한인들이 정작 이웃에 홈리스 쉘터(Homeless Shelter)가 들어온다고 하니 거의 광적으로 반대 운동을 했어요. 주류사회나 타인종들이 한인사회의 이율배반적인 반응에 많은 실망을 느꼈다고 합니다. 고작 65명의 노숙자를 수용하는 쉼터 건립을 반대하려고 1만달러가 넘는 광고비를 지불해가면서 주류매체에 전면광고까지 해서 한인사회가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의 대표적인 소수계로 인식됐다는 건 문제예요”

짐작하다시피 하씨는 LA한인사회의 재력가 중 한명이다.

한남체인이라는 대형 슈퍼마켓 매장 7개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부동산 개발과 투자를 통해 부를 쌓았다. 지난 9월말 전라남도의 농축산물을 앞으로 3년간 3천만달러 규모로 사들이기로 계약한 것은 연매출 1억5천만달러를 웃도는 한남체인 주인으로서였다. LA를 비롯한 남가주와 라스베가스 등에 건물과 골프장 등 부동산 자산만 1억달러가 넘는다.

옆얼굴
“좋은 게 좋다는 말이 싫어. 뒤틀리는 데 뭐가 좋다는 거지?” 하기환 회장은 단체장 경력을 이어오는 동안 온갖 시비에 휘말린 게 성격 탓이냐는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헤럴드경제DB>

◇빈털털이 될 뻔…작은 마켓 매입 한남체인으로 키워

하기환씨는 비즈니스맨으로서 낙폭을 크게 경험했다.

UCLA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임용되기 직전 휴즈항공사에 취직돼 미국생활에 뿌리를 내려버린 뒤 70년대 말 상업용부동산 브로커로서 개발업자로서 사업기반을 다졌다. 80년대중반 2,500만달러의 융자금으로 800유닛에 이르는 아파트와 콘도, 그리고 미드윌셔가의 사무용 빌딩 2개를 매입했다가 폭동과 지진을 겪으면서 90년대 초반 부동산 시장이 추락하자 덩달아 바닥까지 내동댕이 쳐졌다.부동산들이 차압 당한 가운데 빈털털이가 될 뻔한 상황에서 1989년 90만달러에 사들인 작은 마켓이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해준 한남체인이었다.

하씨는 지난 2017년 LA한인상공회의소 회장직을 25년만에 다시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은퇴해야할 올드타이머가 후진들에게 물려줘야할 나이에 다시 자리욕심을 낸다는 뒷말도 적지 않았다.

“칠순 나이에 동네 상공회의소 회장 자리가 욕심낼 만한 건가? 아무도 제 돈 써야하는 회장하려고 나서지 않으니 할 수 없이 다시 나선 거지요.”

그는 임기 1년짜리 LA한인상공회의 회장직을 연임까지 하며 사분오열돼가던 조직을 추스렸다. 50대 나이의 이민 1.5세가 주축인 LA한인상의는 하씨가 일주일에 한번꼴로 음악회나 와인파티 등으로 회원들과 감성있는 소통을 한 노력 덕분에 다른 어떤 단체보다 화합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얻기에 이르렀다.

하씨는 몇년전 서울 평창동에 아담한 단독주택을 마련, LA와 한국을 오가며 보내고 있다. 단체장 일은 더이상 그의 계획에 없다.

“이제부터 퍼스널 펀(Personal Fun)이 최우선이야. 나라에서 훈장 받은 것으로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이민생활을 결산한 셈이지요”

황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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